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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노마디즘 ⑤] 우리는 이미 실제-가상 오가는 ‘유목적 생활인’ / 이광래

by 내오랜꿈 2008.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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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실제-가상 오가는 ‘유목적 생활인’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⑤ -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⑤ 전혀 새롭지 않다


강성만 기자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8년 01월 25일 


» 컴퓨터 모니터와 키보드가 일상의 가장 친숙한 도구가 된지 오래다. 이 교수는 한국인이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자유자재로 유목하며 융합현실 속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노마디즘은 데자뷔(기시감) 현상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전혀 새롭지 않다

네 번에 걸쳐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노마디즘(유목주의)에 대해 비판과 반비판을 펼쳤다.

핵심 논점은 현실 속에서 여러 노마드들이 뒤섞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였다. 김 교수는 이진경 교수가 ‘혁명의 정치학’이란 수사를 통해 적극 옹호하는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는 아무 관계도 책임도 없는 ‘착한 노마드 이야기’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홍 교수는 경쟁·대립·공존하고 있는 여러 노마드들이 ‘개념’으로 묶이지 못하고 ‘이미지’로만 교착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나쁜 노마드’의 존재가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반론을 펼쳤다. 중요한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또 초월적 외부에서 선과 악이 뒤섞여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에서 올바른 삶을 위한 길찾기에 나선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보였다. 

이광래 교수는 이 글에서 우리가 이미 융합의 최전선에 있다면서 노마디즘은 새롭지 않다는 견해를 보였다. 한국인들이 이미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자유자재로 유목하며 융합현실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부의 다양한 힘과 격투하는 사고’인 노마디즘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고 이 교수는 반문했다. 다음 주제는 ‘‘코뮨주의’ 대안인가’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해체는 비상이다 

해체의 외징(外徵)은 비상이다. 해체주의는 비상의 철학사조이다. 그 비상한 외징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종말이다. 그것의 주인공들은 종말과 종결을 좋아한다. 우선 그들은 예외 없이 철학의 종말을 주장한다. 해체주의의 선조이자 아방가르드였던 니체를 비롯하여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데리다의 주장이 그렇다. 

누구보다도 니체는 ‘빠삐용’이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철학적 전통을 탈출하여 이른바 ‘자유의 바다’에 비상착륙하고 싶어 했다. 기존 철학에 대한 답습이 그에게는 단순 노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가 철학노동자들을 혐오한 까닭도 마찬가지였다. 들뢰즈는 니체를 가리켜 ‘철학을 망치질하는 이’에 비유한다. 모리스 블랑쇼도 “니체의 철학을 성찰하는 것은 철학의 종말을 성찰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니체를 전위(前衛)로 숭상하는 이들에게 ‘종말에의 유혹’은 가장 뚜렷한 유전인자였다. 아직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임에도 우리를 위해 변증법과 인간학의 혼합된 약속들을 불태워버린 장본인이 바로 니체였다고 하여 푸코는 니체와의 유전성을 강조한다. 또한 푸코는 “아마도 인간은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는 자일 것”이라고 하여 근대적 주체로서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 데리다도 형이상학적 인간주의(휴머니즘)의 모든 가정 자체를 부인하고 ‘인간의 종말’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종말이란 ‘존재에 대한 사유’의 종말이다.” 이처럼 그 역시 형이상학의 해체와 그 이후의 철학을 위해 주체에 대한 단죄와 퇴출을 명령한다. 

다음으로, 종말에 대한 교의주의자들의 비상한 외징은 그들 자신의 삶마저도 비상한 죽음으로 종결지은 것이었다. 언제나 ‘미래를 위해 글을 쓴다’는 니체가 56살 되던 1900년 매독으로 인한 정신이상(또는 뇌종양)으로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것이 그 전조였다. 종말과 해체의 교의가 크리스마스병이라는 혈우병처럼 열성 반성유전형질이 되어 격세유전되었듯이 죽음의 방식마저도 푸코와 들뢰즈에게 잠복유전되었기 때문이다. 1984년 58살의 푸코가 에이즈로 인한 패혈증으로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것, 그리고 1995년 70살의 들뢰즈가 돌연히 투신자살한 것이 그러하다. 특히 이미지 철학자인 들뢰즈의 죽음은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보여주는 비상한 외징의 클라이맥스가 되었다. 

이들의 죽음은 ‘외징 없이는 유사성도 있을 수 없다’는 푸코의 신념을 실천한 것일까? 어쨌든 푸코는 “하느님은 어떤 사물들을 숨겨놓았으면서도 특별한 형식의 외적이고 가시적인 기호들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게 하셨다”는 16세기 스위스의 의학자 파라셀수스의 말에 따라 죽음의 유사성조차도 종말과 해체의 외징으로 남겨놓았다. 그러나 이들의 비상한 죽음은 또다른 종말의 예후(豫後)나 다름없다. 그것은 니체로부터 시작된 종말과 해체라는 비상한 교의의 종결 징후이기 때문이다. 20세기를 푸코의 세기이고 들뢰즈의 세기라고 서로 덕담하면서도 상속인이나 상속집단을 원하지 않는 프랑스 철학의 특징대로 그들의 죽음은 해체교의적 종말의 징표가 되고 있다. 

비상해제와 후위게임 

이처럼 철학의 종말, 그 비상(非常)은 이미 해제되고 있다. 외징들이 바뀐 것이다. 비상해제나 정상의 생성을 원하는 이들의 후위(後衛)게임, 곧 생성게임이 해체부정이나 통합과 융합으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해체의 여진이 남은 이 땅에서 요즘은 ‘플러스 울트라’(그 너머의 세상)를 외치며 통섭을 부르짖는 환원주의 망령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통섭의 전도사로 위장한 환원주의자들이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데리다의 해체를 빌미삼아 재출현한 것이다. 특히 에드워드 윌슨은 니체의 후예들을 가리켜 ‘무정부주의자, 해적, 반역자, 무지한 심령치료사’라고 극언하며 그들의 해체주의를 융단폭격한다. 그는 해체주의가 모든 주제들을 ‘변화의 무자비한 원심분리기’ 속에 쑤셔 넣었다고 힐난한다. 

그 대신 윌슨이 주장하는 것은 ‘봉합선이 없는 인과관계의 망’이라는 사회생물학으로의 환원주의적 대통섭이다. 심지어 통섭이 미래의 의심할 수 없는 대안이라고까지 단언한다. 그러나 해체주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윌슨의 팡글로스주의(통섭의 세계가 모든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최선이라는)도 ‘생물학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반박하는 그 내부의 적과의 후위게임 속에 휘말려 있다. 

종말과 해체의 또다른 후위게임은 해체가 아닌 융합주의 거대이론으로의 회귀이다. 해체 이후의 에피스테메(인식소)는 융합(convergence)이다. 미래는 해체 그 너머의 세상, ‘플러스 플러스 울트라’의 융합현실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소생한다면 그는 국가장치가 아닌 실제와 가상의 융합장치, 자본주의 기계 대신 융합주의 기계, 그리고 전쟁기계가 아닌 인터페이스(이종공유) 기계의 상호 횡단적 교섭을 설명하려 들 것이다. 그의 노마디즘은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의 다층구조적 프랙털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융합현실과의 게임이론으로 수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1979년 10월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에 찾아온 드레퓌스와 레비노를 보고 ‘나의 암살자들이 왔군!’ 하고 외치던 푸코도 융합현실에 소생한다면 초감도 센서로 된 인터페이스 안경을 통해 그들의 상세한 정보를 불러내며 ‘나의 후원자들이 왔군!’ 하며 반길 것이다. 

우리에게 해체는? 

이처럼 우리는 융합의 최전선(frontland)에 있다. 철학적 유목민이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유목적 생활인이 된 지 오래다. 그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유목을 체득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노마디즘은 새롭지 않다. 새로운 리좀인 가상의 다리들(cyber-bridges)이 연결하는 동시편재적 융합현실에서 인터페이스를 만끽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노마디즘은 데자뷔(기시감)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유목민으로서의 한국인은 들뢰즈가 말하는 ‘탈코드화’나 ‘기관 없는 신체’, ‘국가장치’나 ‘전쟁기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가 ‘노마드적 사고란 외부의 다양한 힘과 격투하는 사고’라고 정의한들 이미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자유자재로 유목하며 융합현실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국인에게는 그게 무슨 의미일 수 있을까?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하지 못하듯이 ‘지금 여기에’ 가상현실로 열려 있는 우리의 유목현실도 들뢰즈의 노마디즘대로는 전개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융합현실(융합사회체)에서는 이미 자본보다 정보가 들뢰즈가 말하는 ‘충실신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 이광래 교수

그의 노마디즘이 우리를 더욱 데자뷔적 착각 속에 빠져들게 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들뢰즈가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어느 나라보다 유목적 삶에 익숙한 우리의 기술환경과 생활문화 때문일 것이다. 

이광래 교수/강원대 철학과 



이광래 교수는 1946년생으로 고려대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연구자로서 초창기 20년 동안은 반철학과 해체주의 계열의 프랑스 철학에 연구의 초점을 맞췄고 그 이후 15년은 일본과 동아시아 사상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욕망 이동사> 저술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미셸 푸코-광기의 역사에서 성의 역사까지> <프랑스 철학사> <일본사상사 연구>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내오랜꿈 --------------------------------------------------------------------------------- 


이런 인간이 푸코의 <말과 사물>을 번역했으니, 그 번역이 제대로 될 리가 있었을까? 명색 철학한다는 자가, 그것도 푸코를 공부했다는 자가 이런 글을 전혀 부끄러움도 모르고 쓸 수 있다는 게 기가 찰 뿐이다. 이건 완전히 니체, 푸코, 들뢰즈가 정신이상자, 또라이 아니었냐는 소리보다 더한 글이다. 


철학자를 그 철학으로 평가하지 하지 않고 사생활로 평가하는 철학교수라니. 안 그래도 개판인 번역 때문에 이광래가 번역한 <말과 사물> 번역본만 보면 신경질 나는데, 확 그냥 찢어버려야겠다. 썩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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