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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생태환경

그룬트비와 ‘삶을 위한 학교’ / 이문재

by 내오랜꿈 2014.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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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그룬트비와 ‘삶을 위한 학교’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출처 : http://news.khan.co.kr



안데르센을 알면 하나를 아는 것이고 키에르케고르를 알면 둘을 아는 것이다. 그럼 마지막 셋은? 그룬트비와 자유학교다. 세계적인 동화작가와 실존주의 철학자, 선진적 낙농업. 이것이 그간 내게 각인되어 있던 덴마크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최근 <삶을 위한 학교>(시미즈 미츠루 지음, 김경인·김형수 옮김, 녹색평론사)를 접하고 덴마크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일천했는지 절감했다. 덴마크는 먼 나라가 아니었고, 그룬트비는 전근대의 교육자가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프로이센에 패망한 북구의 한 작은 나라가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되찾자”는 내발적 발전론을 내걸고 황무지를 옥토로 일궈내며 ‘강소국’의 대표적 모델로 떠올랐다. 누구를 뒤따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낸 것이다. 그 중심에 그룬트비(1783~1872)라는 실천적 사상가가 있었다. 그는 당시 유럽 상류사회를 지배하던 라틴어를 거부하고 지역 언어로 밀려났던 덴마크어를 회복시켰다. 신화와 역사를 시로 엮어내 이를 농민(민중)과 함께 노래했다. 

민중이 스스로 각성해야 국가와 대등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그룬트비의 신념을 구체화한 것이 덴마크 자유학교, 즉 폴케호이스콜레였다. 폴케호이스콜레는 ‘민중의 대학’이란 뜻이다. 영어권에서는 ‘자유학교’로 표기한다. 시험이 없으며 졸업장도 없다. 17세 이상이면 누구나 국적에 관계없이 입학할 수 있다. 전교생은 수십 명을 넘지 않고, 교사와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한다. 독서보다는 대화를 우선하고, 지식보다는 경험을 강조한다. 

교과 과정은 덴마크 전통을 현재화하는 전통적 과목, 취미와 실용 과목, 생태-환경과 같은 지구적 이슈를 다루는 현대적 과제 등 크게 세 분야를 자체적으로 조합한다. 150년 전 탄생한 자유학교는 현재 덴마크 전역에 80여 개가 운영되고 있다. 종류도 다양하다. 자유초등학고, 자유중학교, 예술·공예학교, 여행하는 자유학교 등이 있는가 하면, 교원양성대학도 있다. 엄연한 사립학교인데도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교육 내용에 관해서는 일절 간섭을 받지 않는다.

대안사회에 대한 창의적, 자율적, 협동적 실천. 이것이 덴마크 자유학교를 지탱하는 정신이다.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자유학교는 무엇보다도 ‘대화와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그룬트비는 “좋은 귀를 통해서만 정신의 귀가 열린다”라고 말한 바 있다. 민중이 자각에 이르도록 하는 매개물 중 하나가 역사와 시였다. 뛰어난 시인이기도 한 그룬트비에게 문자가 아니고 말로 전승된 문학은 민중에게 생의 신비와 존엄을 일깨우는 빼어난 공유재였다. 

자국 역사와 언어를 강조한 그룬트비의 교육관은 자칫 국수적 민족주의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덴마크의 정체성을 존중하면서도 보편적 가치를 외면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 치하의 유럽에서 유일하게 유대인을 내치지 않은 나라가 덴마크다. 덴마크의 종교적 관용이 이토록 남다를 수 있던 것은 그룬트비와 자유학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현재 덴마크 자유학교가 인터내셔널 피플스 칼리지(IPC)나 ‘여행하는 자유학교’ 등을 통해 지구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자유학교의 개방성, 보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산실인 자유학교의 어제와 오늘을 따라가다 보니, 감탄이 탄식으로 변했다. 우리의 교육은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교사와 학생은 있지만 ‘상호작용’은 없는 학교. 그래서 학교만 있고 교육은 없는 나라, 그래서 제도교육이 민주주의의 성숙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나라, 그래서 ‘세월호 이후’를 상상하기 힘든 나라… 문제의 원인 중 하나를 <삶을 위한 교육>에서 찾을 수 있었다. 우리의 근대화 모델이 애초에 잘못 설정되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강대국을 쫓아다닐 것이 아니었다.

땅과 농민,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해온 덴마크와 같은 강소국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룬트비의 자유학교는 우리가 척추를 곧추세우고 집중해야 할 ‘오래된 미래’다. 덴마크 자유학교는 시민의 힘으로 교육을 사회적 공통자본으로 정착시킨 보기 드문 모범 사례다. 국가와 (초국적)기업이 손을 잡고 무서운 속도로 사회의 공통재산을 사유화하는 이때, 교육만이라도, 아니 교육부터 공유재로 만들어내야 한다. ‘교육이 미래’라는 데 동의한다면, 교육의 공공성을 확립하는 기획은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시민운동, 사회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안데르센을 알면 하나를 아는 것이고 키에르케고르를 알면 둘을 아는 것이다. 그럼 마지막 셋은? 그룬트비와 자유학교다. 세계적인 동화작가와 실존주의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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