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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생각

소수자, 그 모든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 홍석천씨 동성애 강연 기사를 보고

by 내오랜꿈 2007.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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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 그 모든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홍석천씨 동성애 강연 기사를 보고 


지난 3월 27일(목) 서울대에서 열린 '새내기, 평화와 인권을 만나다'(주최 서울대 제2대학) 기획강연회 네 번째 시간에 홍석천씨가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커밍아웃' 이후의 모진 아픔들을 이겨내고 방송과 인권운동에 앞장 서는 그를 보면서 옛날에 썼던 글을 약간 가다듬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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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이었던가,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던 부영극장(지금은 부산극장으로 바뀌었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시간이라는 이벤트를 위해 사회자의 소개로 무대에 오른 감독과 배우에게 1000여 명의 관객들은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감동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하류>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황색 저널리즘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정사'라는 선정적 문구를 동원해 국민정서 운운하는 식으로 언급되면서 "하늘이 두 쪽 나지 않는 한 공개상영이 불가능한" 영화라는, 자못 선언적인 수사까지 동원되었던 영화다.

전작 <애정만세>의 모티프를 잇는 차이밍량 감독의 이 영화는 현대사회, 그리고 그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외 또는 의사소통의 부재라는 화두를 아웃사이더의 동성애적 코드를 통해 우회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곳곳에 배치된, 의도된 영화적 질문을 무시하더라도 한글 자막없이 상영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온몸을 죄어 오는 긴장감은 말로서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다.

'언어'가 아닌 '몸'으로 느끼는 그 무엇?

어쩌면, 극장을 메운 각양각색의 관객들로부터의 그 열렬한 지지가 잘 만든 감독이나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배우(이강생)에 대한 단순한 예우 차원이었을 뿐인데 나 자신이 괜한 '사고의 오버'를 범하고 있는 것인지도...

'생각없는' 말들 속에서...

▲ 지난 3월 27일, 서울대에서 강연하는 홍석천씨 ⓒ2003 임김오주

"재수없어!"
"뭔 '지랄'이래?"

홍석천의 '커밍아웃' 이후 홍석천을 비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원색적 표현을 써가며 욕을 했었다. 그 어떤 논리가 아니라 다분히 감정적인 표현들이 거의 주종을 이루었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에게 뭐 그리 맺힌 게 많으면, 이런 말까지 해가며 자신의 이해관계도 걸리지 않은 일에 '분노'를 표현해야 하는가?

'좋게' 생각하자면, "나는 니가 싫다", 또는 "너의 그 동성애 취향이 싫다"는 것을 좀 더 강조한 표현이라 생각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좀 과격한 표현을 써서 공개 게시판에 올린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그냥 웃어넘겨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다.

소수자, 그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

그런데 한편으로는, 언제까지 '주류사회'가 인정하는 정치적, 문화적 코드 속에서만 우리의 가치평가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이 문화적, 정치적 다수가 아닌 '소수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예컨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라는 (사회적 부의) 대립항에서 소수자는 '못 가진 자'이다. 여기서 우리들 대다수는 못 가진 자일 수밖에 없고 그러기에 우리들은 소수자의 범주에 속한다. 그렇지만 소수자라 해서 인간적으로 터부시 당하거나 배척 당하는 사람은 드물다. '남자와 여자'라는 대립항에서 소수자는 '여자'이다. 이 대립항에선 우리들 가운데 절반은 소수자의 범주에 속한다. 이 범주에서도 사회적 차별이나 터부가 없는 건 아니지만 또 어쩌면 보는 이에 따라서는 아주 심각한 정도이지만, '여자'라는 소수자를 인간적으로 터부시하거나 배척하는 건 드물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라는 대립항에서 소수자는 '동성애자'이다. 하지만 이 범주에서 '동성애자'라는 소수자는 거의 '사람 취급 못 받을' 정도로 터부시 당하고 배척 당한다.

여기서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소수자' 문제는 사회적(양적) 다수, 소수를 넘어서는 정치적, 문화적 코드의 문제라는 사실. 곧 다수자가 항상 '선'이고 '모랄'하고 '제너럴'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소수자' 문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여자'라는 소수자가 자신이 원해서 '섹슈얼리티적' 정체성을 선택한 게 아니듯 '동성애자'라는 소수자 역시 자신이 원해서 '섹슈얼리티적' 정체성을 선택한 건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신체적 적응일 뿐이다.

그런데 왜 어느 것은 되고 어느 것은 안 되는가?

이 너무도 당연한 질문에 도덕적 가치 운운하며 합리성을 부여하는 모든 대답은 한 마디로 헛소리일 뿐이다. 차라리 체제유지를 위해 다수라는 힘의 우위를 관철시키기 위한 주류사회의 모범답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대립항의 설정에 따라 누구나 다수자가 될 수도 소수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 직장 내에서도 가능한 범주이며, 심지어 한 가족 구성원 안에서도 가능한 범주이다. 아들과 딸이라는 대립항의 설정, 공부 잘하는 첫째와 못하는 둘째라는 설정 등과 같이.

따라서 어떤 사람을 '소수자'라는 이유로 터부시하는 것은 언제 자기 자신에게 목덜미를 겨누고 다가오는 부메랑이 될지도 모르는 날선 칼날을 던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모든 '아웃사이더'에게 경배를

주류의 '금기'라는 도덕에 온몸을 내어 맡긴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라는 '아웃사이더'는 그 자체가 저항의 몸짓일 수 있는 것이고, 그 존재 자체가 저항이라는 '정치적' 코드로 읽히는 한, 우리 사회에서 '차별'―그것이 성적인 차별이든, 지역적 차별이든, 계급적 차별이든지 간에―이라는, 누구나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우리의 몸과 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운동'이라는 변화, 변혁의 흐름에서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아웃사이더'에게 경배를!


<하류>는 어떤 영화인가?


글머리에서 잠시 언급한 <하류>가 마치 동성애를 주로 다룬 영화인 것 같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 <하류>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첨부한다(아마도 국내에서는 합법적으로 보기 힘들 거라 짐작된다). 

전작인 <애정만세>와 마찬가지로 현대 대만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사소통 결핍과 소외문제를 다루고 있다(<하류> 다음 작품인 <구멍>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끔찍하다. 똑같은 주제지만 비슷한 얘기가 가족 안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사실 <하류>에서 동성애 장면은 몇 분 되지 않는다. 또한 그것도 의사소통의 부재에 시달리고 있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에 곁다리로 끼어든 것 같은 비중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 지붕에서 살지만 생전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 어머니는 포르노를 제작하는 남자를 애인으로 두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과는 말을 나눈다. 그러나 아들은 부모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차이밍량은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가족의 이야기에다 물의 이미지로 화면 심층에 풍부한 의미를 쌓아놓는다. 그걸 알아챌 수 있다면 <하류>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영화다. 

영화 중반에 아들이 목을 다쳐 몸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불능성'의 모티브까지 영화 줄거리에 끼워넣고 음미하다 보면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도대체 어디서부터 해법을 찾아야 할지 골치가 아플 정도이다. 

<하류>의 마지막 부분은 서로의 몸을 탐닉하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알아차리곤, '나는 그래도 너는' 이라는 듯이 아들의 빰을 후려치며 나간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시 찾아와서는 "용한 의원이 있으니 가 보자"라는 말을 남기고 나간 뒤, 걷힌 블라인드 사이로 밀려드는 햇빛을 응시하는 아들의 시선으로 마무리된다.

그 햇빛 속에서 '희망의 알레고리'를 찾아내든 '절망의 늪'을 보든 그건 각자의 몫일 것이다. 



written date:200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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