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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모습/생각

다수의 '편의' 소수의 '권리'

by 내오랜꿈 2007.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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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편의' 소수의 '권리'
'장애인이동권연대'의 가두 시위를 보면서 



어제 <오마이뉴스> 메인면의 한 기사를 보면서 하루 종일 마음이 우울했다. "이것이 국민 섬기는 참여정부냐?"하는, '장애인이동권연대'의 가두행진과 관련된 기사가 그것이다. 단순히 경찰이 가두 행진을 막아 물리적 충돌이 일어난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바라보면서 들었던 생각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비정상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거나 이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단순히 '불쌍하다'는 식의 동정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현재 약 150개 가량의 댓글이 달려 있는데, 상당수의 댓글에서 이런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기사의 상당수 댓글은 장애인에 대한 어떤 편향된 시각을 드러내는게 아니라 왜 굳이 취임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야 하는가, 라는 류의 글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이 부분에 대한 가치판단은 독자 여러분의 몫으로 돌리고 뭐라 하지 않겠다. 다만, 그 기사의 말미에 실린 사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지하철 하나 타기 위해서조차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오늘 우리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장애인들에게 '이동권 확보'라는 문제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생존권과도 같은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작년 하반기에는 서울시에서조차 서울 시내 모든 지하철역의 장애인용 리프트 시설(솔직히 다분히 생색내는 형식적인 시설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을 없애고, 노약자/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만들겠다는 발표도 이미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언제 그것이 지켜질지 모르겠지만 빈 공약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우리는 흔히들 우스갯소리 비슷하게 '내거 내맘대로 하는데 네가 왜?' 라는 소리를 자주 하고 듣게 된다. 물론 반 농담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속에는 우리 모두가 너무나 쉽게 간과하게 되는 게 있다.

그것은? 거의 TV를 보지 않는 편이라 어떤 자리에서 TV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 이야기가 나오면, 거의 입을 다무는 편이다. 물론 TV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언급되는 드라마나 프로그램 전혀 모르지는 않는다. TV를 잘 안 본다 뿐이지 MBC나 KBS, SBS 웹사이트는 자주 들어갈 뿐만 아니라 FM 라디오 방송은 지금도 인터넷을 통해 들으니까.

하지만 가끔 TV라는 매체의 '묘한' 매력에 이끌릴 때도 있다. 제법 오래 전의 일인데, 어느 공중파 방송의 어떤 프로그램에서 탤런트 허준호가 장애인 한 명과 같이 휠체어를 타고 그 장애인의 고통을 체험하는 코너가 있었다. 그게 상업방송의 또다른 시청자 끌기에 불과하든 아니든, 체험을 끝낸 허준호의 감동스런 말들이 입에 발린 소리든 아니든, 그건 참으로 '계몽적'이었다.

차를 타고 가거나 운전을 하다 보면, 도심 한가운데 줄줄이 이어진 횡단보도가 원망스러울 때가 많다. '왜 이렇게 차량 통행이 많은 곳에 육교나 지하도를 만들지 않느냐' 하는, 볼멘 소리가 절로 나오는 그런 불만들 말이다.

그러나 내가 그런 불만을 접으며 가슴 깊이 반성하게된 계기는 무슨 큰 깨달음이나 논리가 아니었다. 우연히 눈앞에 보여진 오도가도 못 하는 휠체어….

한 4, 5년 전으로 기억하는데 8월의 태양이 데워 내는 아스팔트 열기가 사람들의 숨을 헉헉거리게 만드는 종로 어느 지하철역 입구에 저만치 앞서 가던 휠체어 한 대가 멎었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뭔가를 누르고 있는 것을 보고, '아 저게 장애인들 편의를 위해 지하철역마다 설치하고 서비스한다던 그거구나' 싶어 걸음을 멈추었다.

정말이지 어떻게 하는 것일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었다. 그러나 그 호기심이 얼마나 '사치'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신 땀을 훔치는 그 장애인 앞에는 5분이 지나도 나와야 할 역무원의 모습은 없었다.

얼마 만에 역무원이 그 장애인을 지하철 안으로 데려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발걸음을 돌리면서 들었던, '이런~' 하는 생각. 지하철 하나 타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려야 하는 저 장애인이 모든 길을 건너기 위해 지하도나 육교를 오르락내리락 해야 한다면?

여기서 혹자는 반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수의 장애인을 위해 다수의 비장애인의 편의가 무시되어도 좋다는 말인가?'하고. 결론부터 말하면, '다수의 편의가 무시되는' 것에 방점을 찍지 말고 '소수(자)의 권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사실. 이것은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이분법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수의 편의를 위하기보다는, 소수자의 권익을 위하여 휠체어가 못 다니는 육교나 지하도보다는 교통에 지장을 줄 수도 있는 횡단보도가 권장되고, 하루 십만 명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에도 십만 명의 비장애인의 편의보다는 단 한 명의 장애인을 위하여 휠체어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인류문명이 오래 고민한 끝에 내린 소수자권리에 대한 최종결론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문명의 '진보'요, '발전'이다.

어떤 것을 자유로이 즐길 권리와 그것에 따른 피해를 보는 입장의 반대할 권리가 충돌할 때 다수의 즐길 권리보다 소수의 반대할 권리에 손을 들어주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내거 내맘대로'가 좀더 신중해져야 하는 이유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내 자식 내가 때리는 데 네가 왜 간섭이냐?" 하는 항변은 "내 마누라 내가 때리는 데 네가 웬 간섭이냐?"하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인정되지 않는다. 다수의 폭력 앞에 멍드는 '소수자의 권리'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낙태, 동성애, 사형제도 반대 등 인권적 문제뿐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파업권, 교사의 단결권 등 제반 사회 문제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다수의 편의보다는 소수(자)의 권익을 옹호하고 보장하는 것이 문명의 진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 하나. 그렇다면 얼마 전 우리나라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의사들의 '파업'은 어떻게 봐야 할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겹쳐져 있어 무엇이라 결론 내릴 자신은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그들, 의사들은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다수(자)였고, 다수(자)의 편을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wrwtten date:200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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