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나무가 원산지인 중국에서 우리 나라에 전해진 시기는 대략 1,500년경으로 보고 있다.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치자와 관련된 대부분의 자료에서 그렇게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어느 한 자료에서 언급된 걸 다른 자료나 책에서 그대로 복사하여 반복 서술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생활 속의 나무』(정헌관, 2008)란 책을 보면, 강희안이 쓴 원예에 관한 책 『양화소록』에 치자나무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꽃이 희다, 꽃 향기가 풍부하다, 겨울에도 잎이 푸르다, 열매는 물들이거나 한약재로 쓴다'는 게 강희안이 정리한 치자나무의 네 가지 특징인데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서술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강희안이 정리한 치자나무의 특징이 아니라 강희안이 살았던 시대다. 기록을 찾아 보면 강희안은 1417년에 태어나 1464년에 죽었다고 나온다. 세종, 세조 때의 문신으로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으나 성삼문의 적극적인 변호로 화를 면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은 소나무, 국화, 석류, 매화, 배롱나무 등 당시 지배층들이 즐겨 감상하고 키우는 수십 종의 관상식물 재배법과 이용법 등을 설명하고 있는 책으로 조선 후기 농경제론의 집대성이라 평가 받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도 인용될 만큼 양화서의 기본서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런 『양화소록』에 치자나무가 수록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나라의 치자나무 도입 시기를 1,500년경보다는 적어도 오십 년, 백 년 정도는 앞당겨야 할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 쪽의 기록만 보고 정리했을 수도 있지만 당대에 기르지도 않는 식물의 재배법이나 이용법을 쓴 양화서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식물을 정리한 것도 아니고 수십 종의 관상식물만 다루면서 전해지지도 않은 관상식물의 재배법을 다룬다는 건 쉽게 납득하기 힘들다. 기르지도 않는 식물을 어떻게 관상한다는 말인가? 그러니 『양화소록』을 인정한다면 치자나무의 우리 나라 도입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1,500년경이 아니라 조선 초기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 치자나무 꽃은 홑꽃이다. 장미처럼 겹꽃이 피는 건 관상용으로 개량한 변종 겹치자나무다.
치자나무의 학명은 'Gardenia jasminoides'인데 종소명 'jasminoides'는 '재스민과 향이 비슷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향이 강한 꽃의 대표격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 바로 재스민인데 치자꽃 향이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로 붙인 것 같다. 난대성 식물이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제주도나 남부 해안지방에서만 노지 재배가 가능하다. 그런데 인터넷이나 SNS에서 간혹 겹치자꽃이 피는 나무를 마치 치자나무인 양 속단하고서는 치자 열매가 맺히는 치자나무를 '열매치자'로 부르고 있다. '열매치자'라니, 도무지 어이가 없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치자나무는 원래 모두 열매가 맺힌다. 이런 치자나무를 겨울이 추운 지방에서도 자랄 수 있게끔 개량한 변종이 바로 겹치자나무다. 겹치자나무는 장미처럼 겹꽃이 피지만 열매는 맺히지 않는다. 치자나무는 겹꽃이 아니라 홑꽃이 핀다. 인터넷에는 '영혼 없는 앵무새'가 너무 많이 돌아다닌다.
우리 집 마당에는 치자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다. 하나는 10년생 정도고 하나는 4년생이다. 10년생의 가지를 잘라 삽목으로 키운 것이 4년생 나무다. 우리가 한해 동안 쓸 치자 열매는 한 그루에서 딴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꽃을 보고 싶은 욕심에 번식시킨 것이다. 치자 열매는 오래 전부터 한약재로 쓰였다고 하는데 해독, 해열, 소염, 지혈 등에 약리작용이 뛰어나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는 염색이나 방부용으로 쓰였다. 우리 집에서는 주로 전을 부칠 때 치잣물을 우려내어 사용한다.
▲ 막 수확했을 때의 치자(2016. 11. 25)
▲ 수확한 지 6일 지난 지난 모습(2016. 12. 01). 위 사진과 비교해 보면 6일 만에 색깔이 완전히 변했다.
▲ 40일 정도 말린 치자 모습(2015년 수확 치자)
치자는 열매가 익으면 노랗게 변하고 열매를 따서 후숙시키면 서서히 주황색으로, 붉은색으로 변해 간다. 노란색 열매가 후숙 과정을 거치면서 카로티노이드계 색소인 크로신(crocin)의 영향으로 붉게 변하는 것이다. 카로티노이드 어쩌고 하면 괜히 어려운 말 같은데, 당근에서 붉은색의 결정을 추출한 다음 카로틴이라 명명한 것에서 유래하는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카로티노이드계 채소의 대명사로 당근이 자주 언급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항암 효과가 뛰어나니 어쩌니 하며 뉴스 등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인데,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녹황색 채소에는 대부분 카로티노이드계 색소가 들어 있다. 크게 알파 카로틴, 베타 카로틴, 리코펜 등으로 나뉘는데 노란색이나 주황색을 띄는 당근, 고추, 단호박, 파프리카 등에 함유된 것이 카로틴이고 토마토, 수박 등 붉은색 채소에 함유된 것이 리코펜이다. 치자의 뛰어난 약리작용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카로티노이드계 식물이 가지고 있는 약리작용의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한방에서 설명하는 각종 식물의 약리작용을 보면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기술되어 있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아픈 사람이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영양과잉 시대인 지금, 그 자체 한두 가지만으로 우리 몸의 건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식물은 드물다. 항암 효과 운운하며 주황색이나 붉은색의 카로티노이드계 색소가 함유된 채소가 새삼 주목받지만 오래 전부터 우리가 먹어 왔던 시금치나 각종 해조류에도 카로티노이드계 색소는 풍부하게 들어 있다. 산삼이 만병통치약으로 각광 받는 이유는 사포닌 때문인데 도라지에도, 더덕에도 심지어 무나 콩에도 사포닌은 충분히 들어 있다. '산삼 먹는 사람보다 산삼 캐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진리다. 몸에 좋은 것 몇 가지 먹거나 먹지 않는다고 건강이 갑자기 좋아지거나 나빠진다는 생각에 이득 보는 건 약삭빠른 장사치들 뿐이다.
12월의 첫날, 장독대 위에서 치자는 점점 붉게 물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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