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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는 것들/Book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 민족 섹슈얼리티 병리학> - 우리 몸에 각인된 근대의 '얼굴'

by 내오랜꿈 2007.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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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의 심해를 탐사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근대 계몽기로 돌아갈 것이다.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이 기차를 타고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가듯이. 물론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순연한 첫사랑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온통 역설과 아이러니로 뒤범벅된 '원체험'들이다." ('들어가는말' 중에서)


 
 
 
 

"1. 우리가 여행을 다니다보면, 뜻밖의 곳에서 뜻밖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움은 종종 나 자신만의 것이거나 함께 한 동료들만의 것이 되기 십상이다. 그 아름다운 곳에서 일상의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갖다 붙이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한 아름다움은 한낱 외지인의 호들갑스러움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사회과학적 용어로 말한다면 '외부자의 시선'이 찾아낸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동강의 생태학적 보고로서의 지위와 아름다움, 아우라지와 어라연의 아름다움 역시도 근대라는 이름으로 세련된 외부자(도시인들)의 시선이 찾아낸 '풍경'인 것이다. 그러나 아우라지를 건네주는 뱃사공의 눈에 비친 그곳은 그저 평생을 보낸 삶의 현장일 뿐일 것이다. 

2. 우리가 '민비'로 알고 있는 명성황후는 90년대 들어 뮤지컬 <명성황후>를 통해 각광을 받더니 최근에는 TV사극 <명성황후>에서도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다 장렬하게 순교한 조선의 국모로 추앙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를 가장 사실적으로 서술했다는 황현의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에조차 '민비'는 한번도 개혁의 주체로 묘사된 적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민비가 대원군과의 권력투쟁을 위해 등용한 민씨 일가는 당시 대표적인 탐관오리이자 무능하기 짝이 없는 매판관리의 전형이었다. 근대 계몽기의 민족주의 매체 <대한매일신보>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민씨 일가의 부패상들이 고발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민비'가 '명성황후'라는 새로운 기호로 부각되는 현상의 근저에는 '반일=국수=지선(至善)'이라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 반하는 것은 무조건 애국적인 것이라는 지독한 강박증! 한국 축구는 일본 축구에 무조건 이겨야 한다(실력이 안 되면 정신력으로라도)는 지독한 애국증!

3. 나름대로 여성문제에 상당한 인식을 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자칭 '페미니스트' 여성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 일면적 반남성적 시각에 경악을 하게 될 때가 많다. 여성해방이라는 게 결코 남성을 적으로 삼아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건 6,70년대 여성해방론자들이 서구 맑시즘과의 페미니즘 논쟁을 통해 확립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90년대 대한민국의 주류 페미니스트들은 이미 용도폐기된 '남성주적론'의 몽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부장적 권위가 유난히 강한 남한사회의 특수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도가 지나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자칭 (얼치기) 페미니스트 아줌마들의 '박근혜 대통령론'으로 희화화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현준/김규항의 '그놈'들의 사회주의, '그년'들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연상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고미숙의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가 분석하는 대상 곧 민족, 여성(섹슈얼리티), 병리학(기독교)도 철저하게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감추어온 신체적 표상의 왜곡과 굴절을 파헤치며 시작한다. 위에서 예로 든 '외부자의 시선'이나 '민비', '축구민족주의' 등도 모두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야기다.

제1장에서는 먼저 근대성의 태풍의 눈인 '민족'이라는 초월자가 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 출현했는지, 그리고 어떤 심리적 기제로 정착되어 가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국가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허상적 군주의 자리를 대체한 민족은 이제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초월자가 된다. 

'민족'을 설명하면서 TV 드라마 <가을동화>의 예를 들며 지은이는 한(恨)의 정서가 과연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인가고 되묻는다. 남녀 주인공의 운명적 엇갈림, 어김없이 뒤따르는 삼각관계,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주인공의 불치병과 죽음. 여기엔 민족이라는 '텅 빈' 기호를 한이라는 과잉 정서를 통해 메우려는 매너리즘이 개입해 있다는 얘기다. '왜 우리에게는 사랑의 능동적 환희를 통해 삶의 경계를 넓혀가는 식의 발상에 발을 딛지 못하는 것일까'고 반문하면서….

이로써 민족 혹은 그 의식은 서구라는 타자와 길항하면서 탄생한 근대적 산물임이 밝혀진다. 민족이라는 기표가 초월적 지위를 획득하면서 혈통적 순수성, 단일 민족, 서사로서의 역사라는 표상이 뒤따르게 된다. 

제2장에서는 여성이 민족이라는 범주에 편입되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배치가 어떻게 변환되는지를 분석한다. 부국강병을 위해 근대 계몽기는 여성의 힘을 당위로 요청한다. 이는 물론 서구 문명국가들을 맹목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고 한다. 

여성이 국민으로 편입된 것은 다수의 여성이 참여한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이천만 중 여자가 일천만이오. 일천만 중에 지환(가락지) 있는 이가 반은 넘을 터이오나" "국채를 갚고 보면 국권만 회복할 뿐 아니라 우리 여자의 힘이 세상에 전파되어 남녀동등권을 찾을 것"이라는 논설 역시 여성 평등권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이 어디인지, 민족주의 담론이 왜 남녀평등권을 인정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은이는 근대에는 논리 이전의 선험적 차원에서 남녀평등, 여성해방이라는 테제가 주어졌다고 진단한다. 이제 국민으로 탄생한 여성에게는 오로지 인구 재생산의 역할과 미래의 국민이 될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주체로만 요청된다. 아울러 여성은 오직 어머니로서만 호명될 뿐 성적 주체로서의 욕망은 완전히 박탈된다. 계몽 담론 내에서 성적 일탈 전반에 대한 공격이 가해지고 매음녀, 방탕한 여인네들에 대한 마녀 사냥이 시행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한다. 

제3장에서는 근대인들의 신체에 대한 표상을 장악하고 있는 근본 메커니즘으로서의 병리학을 탐색한다. 지은이는 위생과 청결을 강조하는 병리학은 한국의 근대성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라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김옥균, 서재필 등 근대 계몽기의 급진 개화파나 식자층에게 서구의 문명은 위생과 건강이라는 표상으로 다가온다. 건강한 인종과 국민이 곧 부국강병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옥균 등 개화파들은 변소 개량을 주장했다. 바야흐로 위생의 시대가 바로 근대였다는 것. 그러나 개화기 민중은 위생을 위해 관이 권장하는 대로 똥을 모아 놓았으나 오히려 그 악취 때문에 집값이 폭락하는 곤경에 빠졌다. 따라서 '위생이 원수이자, 위생이 곧 고생'이라는 한탄이 많았다고 한다. 몸의 청결에서 시작된 위생의 개념이 영혼도 깨끗히 씻어야 한다는 압박으로 다가왔을 때 선교사와 교회가 몰려왔다고 언급하는 대목도 아주 시사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에게 위생은 야만과 대립되는 문명의 표지로 자리잡았고, 결국 교육과 더불어 국권회복으로 가는 필수불가결한 코스로 자리잡는다. 이러한 병과 위생에 관한 새로운 규정은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급기야 시대를 진단하는 수사학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고 한다. 공중보건, 운동회, 체조 등을 전국민에게 유포시켰던 근대 계몽기의 담론의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스스로를 아주 '현대적'이라고, 다시 말해서 근대를 넘어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통렬하게 한 방 먹인다. '당신은 전형적인 근대인'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아마도 우리 '현대인'들은 우리의 신체와 무의식에 각인된 '근대성의 표상체계'를 너무 얕잡아보았거나 아니면 감지조차 못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근대화에 대한 목마름과 지난한 투쟁 끝에 달성했다고 의심치 않는 근대적 주체인 우리의 내부가 사실은 '텅 빈' 것임을 말하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신체와 무의식에 각인된 근대성의 표상들이라는 외투를 벗겨내어 '지금, 여기에' 있는 자리를 사유하도록 만든다. 왜? '새로운 주체'를 만들기 위해! 

"기차는 근대인들의 표상체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호이다. 기차가 도래하면서 모든 시공간은 균질화되고 선분화된다. 결국 기차는 근대적 주체 생산의 여러 국면에 깊이 관여한, 문명의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다. (169쪽)

그러나 기차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차'의 출현과 함께. 인터넷은 우리 시대의 기차다. 그것은 20세기 초 기차가 도래하면서 시공간을 완전히 재배치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전혀 다른 시공간을 열어 젖힐 것이다. 이제 누구든 자신의 국적에 갇힐 필요가 없다. (170쪽)

네티즌은 이미 세계를 자신의 서식처로 삼는다는 점에서 세계인이다. 또 여자로서, 남자로서 자신을 고정시킬 이유 또한 사라졌다. 이제 새로운 주체를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낯설고 이질적인 장 속에 능동적으로 뛰어들 수 있는 용기뿐이리라. (172쪽) ('맺는말' 중에서)
 
 
고미숙,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 민족 섹슈얼리티 병리학>, 책세상(2001), 4,900원

목차 

1. 민족 또는 새로운 초월자의 출현
(1). 민족에 대한 원초적 질문. 두서너 가지 
(2). 민족. 그 신성한 기호의 출현 
(3). 한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인가 
(4). 결론 - 최면술. 기억. 달라이라마

2. 여성은 어떻게 국민이 되었나
(1). 범람하는 성. 가부장제 페미니즘? 
(2). "동방견문록" "고려사"를 보면 
(3). 근대 계몽기와 여성의 발견 
(4). 여성이 국민이 되려면? 
(5). 섹슈얼리티에 관한 유쾌한 상상 

3. 병리학과 기독교 - 근대적 신체의 탄생
(1). 근대의 성소들 - 목욕탕. 병원. 교회 
(2). 병리학의 도래와 근대 
(3). 기독교의 병리학적 구조 
(4). 에필로그 - "간장선생"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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