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 - 생의 한가운데
이 인터뷰는 인터뷰 웹진 퍼슨웹과 대중음악비평 웹진 [weiv] (www.weiv.co.kr) 가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이상은 인터뷰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옵서버 몇 명도 인터뷰를 참관하며 간간히 질문을 던졌다. 질문자는 퍼슨웹과 [weiv]로 구분하였다.
1970 : 3월 12일 서울 출생
1988 : MBC 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로 대상 수상
1989 : 1월, 1집 발표
12월, 2집 발표
1990 : 일본으로 유학
1991 : 미술공부를 위해 미국 뉴욕으로 유학 (PRATT INSTITUTE)
11월, 3집 '더딘 하루(Slow day)' 발매
1992 : 4집 'BEGIN' 발매
1993 : 귀국
5집 'LEE SANG EUN' 발매
1995 : 7월, 6집 '공무도하가' 일본 발매 (9월, 한국 발매)
1997 : 다케다 하지무와 '펭귄즈' 결성
7집 '외롭고 웃긴 가게' 발매
영어이름 'LEE-TZSCHE' 사용.
11월, 싱글 'Actually, Finally' 발매 (일본)
12월, 8집 'LEE-TZSCHE' 발매 (2000,8. 한국 발매)
1998 : 8월, 싱글 'Ogiyodiora' 발매 (일본)
9월, 일본영화 [がんばっていきまっしょい(간밧데 이키마쇼이)] OST 'Give it all' 발매 (일본)
1999 : 2월, 싱글 'A path' 발매 (일본)
3월, 9집 'Asian Prescription' 일본 발매 (5월, 한국 발매)
2000 : 10월, 영화 [봉자] OST 'She wanted' 발매
11월, 1991-1999 Best Album 'Don't say that was yesterday' 발매
2001 : 2월, 10집 'Endless lay' 한국 발매 (3월, 일본 발매)
2002 : 3월, The Best of Lee-tzsche 'Asian Breeze' 발매(일본)
2003 : 3월, 11집 '신비체험' 발매
2005 : 6월, 12집 'Romantopia' 발매
출처:<퍼슨웹(http://www.personweb.com)> 2005. 12. 28
박성혜, 김학기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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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24일 우리는 이상은의 크리스마스 공연장에 앉아 있었다. Christmas Mysterium이라 이름 붙여진 그 공연은 2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 성공적으로 한국에 정착한 ‘보헤미안' 이상은의 'Mysterious'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공연 직전 그만 둔 그녀가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열혈 청취자들과 ‘담다디' 시절부터 그녀를 지지해 온 이제는 늙어버린 소녀들, 그리고 그녀가 정말 ‘보헤미안'이었던 시절 타국에서 그녀가 만들어 냈던 무국적 감수성(당연히 그것은 ‘외로움'에 근거했다고 생각한다)과 소통했다고 믿었던 나 같은 사람들까지 공연장은 그렇게 서로 소통되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다양한 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우리는 묘한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다. 우습게도 그녀가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팬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생경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한민국 팬을 위해 앵콜곡으로 ‘남행열차'를 불렀고 그 열광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호응하며 15년 동안 벗어내려 그토록 몸부림쳤던 ‘담다디 이상은'의 모습을 기꺼이 보여주었다. ‘담다디'가 공연의 마지막 곡으로 울려 퍼질 때 우리는 괜히 쓸쓸해져서 그녀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하며 열광하는 팬들의 뒤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보헤미안'이라 불렸다. 앨범 홍보 문구에서도, 간혹 미디어에 모습을 드러낼 때에도 그녀의 상품성은 ‘보헤미안'이란 단어에서 파생되는 감성으로 대변되었다. 그녀는 아이돌이 가지는 저급한 상품성에 진저리를 치며 음악을 찾아 떠난 자유롭고 용감한 예술가로 여겨졌다. 그녀가 ‘리채 Lee Tzsche'라는 이름으로 마침내 대한민국에 역수입되었을 때, 대한민국 가요 씬은 그녀에게 열렬히 경의를 표했다. 한국을 떠난 담다디 소녀는 성숙한 보헤미안이 되어 돌아왔고 Lee Tzsche라는 무국적의 이름으로 외국 거대 메이저 음반사의 s지원을 받는 ‘인터내셔널 아티스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술을 찾아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다 마침내 금의환향한 ‘담다디' 소녀에게 ‘보헤미안'이란 또 다른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가 유배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음악과 예술을 찾아 자유로이 길을 떠난 보헤미안이라기보다 그녀의 재능과 감수성을 세심하게 느끼고 읽지 못했던(혹은 발견해낼 능력이 없었던) 대중과 미디어에 의해 유배된 예술가였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그녀가 오랜 방황 끝에 이룩해낸 지금의 음악적 성취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대중과 미디어가 만들어 낸 것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할 공간을 떠나 외롭게 홀로 버텨내며 자신만의 음악에 다가선 그녀에게 ‘보헤미안' 이란 칭호는 ‘담다디 이상은'이란 칭호보다 더욱 잔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왔다. 광활하고 고독한 유배지에서.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비로소 발견해준 친구들과 함께 이제 이곳에서도 머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실험하고 있는 듯하다. 마침내 지친 몸을 누일 작은 공간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갈 세상 속의 구성원들과 함께 그녀는 이제 그녀의 일상과 그녀를 둘러싼 공간 속에서 삶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한 정착의 결과는 2003년<신비체험>에 이어 2005년 <로만토피아Romantopia>로 이어졌다. 돌아온 이곳에서 살며 사랑하고 배우며 만들어간 그녀의 세상은 지도에도 없는 세상, 로만토피아였을까? 돌아온 그녀로부터 그녀가 꿈꾸는 로만토피아에 뿌리 내리며 살아가는 고통과 기쁨에 관해 들어보기로 했다.
신비체험, 그 전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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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지난 11집 <신비체험>을 기점으로 상당히 편해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또 얼마 전부터 공연에서 ‘담다디'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것과도 혹시 연관이 있는 건가요? 예전 <공무도하가>나 <외롭고 웃긴 가게> 같은 음반을 작업할 때와 지금은 음악을 대하는 마인드가 달라지셨을 것 같아요.
90년대 제가 20대 때였을 때, 우연찮게 일본 음반사 분들과 같이 작업을 하게 되었죠. 그분들이 추구하는 음악이 팝 음악이 아니라 컨템포러리 뮤직이었어요.프로듀서 분들이나 회사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까 곡을 써도 약간 월드뮤직의 성향의, 컨템포러리 음악을 추구하게 된 거죠. 음, 이제 생각해 보면, 그때 제가 그걸 꼭 하고 싶어서 했다기보다 그냥 그러게 된 거거든요. 그런 어른들을 만나서 그런 자극을 받으니까 그런 작업을 하게 된 것뿐인데… 그러면서 자꾸 생각을 하게 되었죠. 내가 정말 좋아하고 내가 진짜 듣는 음악들이 뭔가 하고 나중에 돌아보게 됐어요.
2000년에는 제가 그동안 열심히 해서 OST 음반을 제작하고 목돈이 생겨서 그걸로 런던에 가서 1년 공부를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러면서 거기 음악을 열심히 들어봤더니 이제까지의 월드뮤직이라든가 컨템포러리 음악도 물론 좋지만 대중음악 자체가 굉장히 튼튼하고 영양가가 높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라디오를 틀어놔도, 아, 이게 훨씬 재밌는데,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일부러 장르를 우아하고 고상한 쪽으로 가서 음악의 수준이 높은 것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팝이든 락이든 잘 만드는 게 더 멋있어 보이고. 대중음악에도 깊이가 있다고 해야 하나. 도리어 라디오에 나오는 팝 음악에 너무 감동을 많이 받아서… 그러면서 바뀌었어요. 런던에 가고 난 다음에 만든 음반이 <신비체험>과 이번 <로만토피아>죠.
또 거기서 미술을 공부하는데, 워낙 문화가 발달한 나라라서 그런지 페인팅보다는 오히려 잡지에 나오는 그래픽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의 수준이 너무 높더라고요. 그걸 딱 보고는, 솔직하게 제 자신한테 물어봤어요. 너는 하이한 아트가 좋니 아니면 잡지를 딱 폈을 때의 그라피티 그런 게 좋니. 솔직하게 나는 하이한 아트 말고 이게 더 좋은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다음에는… 그래서 쉬워졌을 거예요.
그렇다면 이야기를 조금 달리 해서, 일본에서의 음악 작업에 대한 평가는 온전히 이상은 씨에게만 돌릴 게 아닌지도 모르겠네요. <신비체험> 이전의 음악 작업에 대해서는 대체로 찬사가 쏟아졌었지만 한편으로는 국제화 콤플렉스 혹은 역수입된 오리엔탈리즘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었는데요. 예전의 음악 작업이 가진 이러한 성격들은 어찌 보면 일본 레코드사의 영향이 컸을 수도 있겠네요.
글쎄요. 일본의 버진 레코드사를 비롯한 일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콤플렉스를 제가 채워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지원을 받았던 면도 있죠. 또 한편으로는 꼭 국제화 콤플렉스라기보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음악 현실이 좀 다르니까 빚어진 결과일 수도 있어요. 그 당시 90년대 일본에서는 외국 음반 시장에 진출을 하고 싶어 했고, 자기 주위에는 그럴 만한 아티스트가 없는데 마침 절 보고는 합작을 하고자 했던 거죠. 그래도 그때 일본의 브레인들이 모여서 도시바 EMI 버진 레코드를 런칭했었죠. 지금은 많이 바뀌어서 시나 링고 같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당시 초기 멤버들의 꿈은 결국은 불발로 끝났지만… 이걸 어떤 방향으로 풀어야 저쪽 영미 쪽에서 반응을 보일까 의논도 많이 하고 아주 진지하게 작업했죠. 그때는 아무도 그런 생각 안했었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무슨 사카모토 류이치처럼 움직인 것도 아니고 거의 신인인데… 그래서 지금 어떤 식으로 비판이 가해져도 저는 할 말이 없는 게, 그때는 다들 아주 심각하게, 이런 걸 했으면 좋겠다,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우리 한 번 잘 해보자 하고, 또 그러면서도 세일즈는 되어야 하고. 그렇게 아주 복잡한, 아무도 안하는 일들을 했었기 때문에… 예,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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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채 LEE-TZSCHE>와 <아시안 프리스크립션 Asian Prescription>은, <공무도하가>나 <외롭고 웃긴 가게> 등의 전작에서 곡을 취합한 형태였잖아요. 전작들은 각각의 컨셉트 형식이 강한 음반이고 한편 굉장히 극과 극에 있는 앨범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걸 편집해서 만들었단 말이죠. 그때 상당히 의외라는 느낌을 받았었어요.
그 기획은 버진 레코드사에서 내놓은 것이었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레코드 사람들끼리 의논을 해서 결정한 거죠. 근데 저는 <외롭고 웃긴 가게>, 이 앨범을 되게 좋아해요. <외롭고 웃긴 가게>는 저예산으로 제작해서 한국에서만 발매된 거예요. 음… 그때 일본에서, 다들 너무 열심히 했거든요. 너무 열심히 열심히 하니까 답답해서 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다… 신경 써야 될 것도 너무 많고 한국 아티스트들도 별로 없고 눈치 봐야 될 것도 너무 많았죠. 그 와중에 그냥 정말 하고 싶은 걸 해서 만든 게 <외롭고 웃긴 가게>예요. 그리고 그 이외의 것들은 다 당시의 시스템 안에서 나의 정체성이나 위치 등을 고려해서 어른들이랑 같이 만든 거니까. 그렇게 따져봤을 때 저는 <외롭고 웃긴 가게>를 좋아했고 또 레코드사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사람을 잘 키워서 해외로 보내려다 보니까 그런 기획음반을 내게 된 거죠.
왜냐하면 레코드사 쪽 하고 계속 긴밀하게 의논을 해 나갈 때 중요한 부분은 이를테면 그런 식으로 해야지 예산을 주겠다, 하는 식이죠. 음악을 듣는 쪽에서는 이게 그냥 자유로운 작품들이겠거니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뒤에는 그게 그렇게 된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배경과 이유가 있고.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지만 그 당시에는 그 방법밖에… 아마도 최선의 방법을 취했을 거예요. 그래도 저는 당시 도시바 EMI 사장님이 안 팔려도 좋고 비용을 줄 테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그랬어요. 그것도 90년대까지의 이야기고 2000년으로 넘어가니까 레코드 회사들이 다 상업주의로 바뀌었죠. 그때만 해도 아주 순수한 시대였으니까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어떠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식의 감회가 있으실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때도 국내에서 굉장히 크게 얘기가 나왔었거든요. 특히 그때 우리나라에서도 세계화 이러면서 누구든지 밖에 나가서 터뜨려 주길 바라는 때에 이상은 씨가 갑자기 주목을 받았으니까요.
너무 일렀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96,7년인데 만약에 7년 정도 후였다면…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걸 하고 결국은 중간에 가다가 멈춘 이유가, 도시바 EMI 내부에서도 사실 스토리가 있었어요. 우타다 히카루를 밀어줄까 이상은을 밀어줄까 하는 문제.
사실 거기서 성공하려면 자본 문제도 좀 있거든요. 많은 자본이 투자가 되면 더 성공도가 높았겠죠. 근데 저희들한테 주어진 예산은 아주 적었고 말로는 재능 있다고 그러지만 그렇다고 그게 무슨 큰 수익성을 보장 받을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했던 부분은 그거예요. 음악을 열심히 하는 것… 런던에서 레코딩하면서 펫샵보이즈 PetshopBoys 프로듀서인 리처드 나이즈라는 분하고 작업을 했는데 아우, 아주 좋다고 그러세요. 근데 안 된 부분은, 이상은은 음악성이 있긴 하지만 그렇지만 너무 대중적이지 않은 음악이고. 그래서 담당자인 일본 분이 아 참 아깝다고, 미안하다고, 우리는 우타다 히카루를 밀어 주기로 했다고. 미국 진출도 이 사람으로 하고. 결국 그래서 잘 됐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문제들이 있었어요.
나는 그냥 매일 곡을 만들어요. 아티스트들은 순수하게 음악을 만들고 있으면 주위에서 프로듀서나 누가 ‘아 이 사람이 어디서 먹힐까.' 쉽게 말하면 그런 걸 고민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 사람을 어떻게 할까 그러다가 아무래도 예산도 없고. 자신만만하게 떠들어 댄 쪽은 버진 쪽이었고 그러다가 암튼 우타다 히카루 사건이 나고. 저는 슬펐죠. 약간 슬프면서 되게 기분 나빠서 영국으로 떠난 거거든요. 뭣들 하는 거야 이것들이, 이러면서.
현재 지금 상황에서 다시 돌아봤을 때는 결과적으로 더 잘 된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글쎄요. 지금 같이 음악하고 있는 테오라는 친구가 있어요. DJ하는 친구인데 뉴욕에 서는 DJ하기가 더 쉬운 모양이에요. “누나, 가서 놀면 되잖아, 가자.” 그래요. 아, 그래. 지금은 뭐 그게 중요한 시대도 아니고. 이제 그때만 해도 일본이 버블 직전이었기 때문에 돈들이 막 넘쳐났죠. 문화에 투자하고 싶고 괜찮은 아티스트 있으면 보내주고 싶고. 그런 분위기였어요. 그건 시대적인 분위기고 뭐라 말할 수 없죠. 그들이 왜 시대를 못 뛰어 넘었나 이런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리고 지금은 그냥 미국에 가서 살면서 인디 레이블이든 뭐든지 되기만 하면 어떻게든지 재미나게 작은 규모로도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아, 알게 됐다기보다 지금 그런 것들이 많이 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저한테는 공부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건 있거든요. 아, 음악이 국경을 넘는다는 것이 굉장히 가치가 있구나, 라는 걸 계속 배운 거죠. 당시 일본에서이런 말을 들었어요. “너의 음악이 우리 일본 사람들 마음에 와 닿고 또 음악 관계자들이 들었을 때 다 좋다고 한다. 넌 순수하게 무엇이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음악인지 고민해봐라. 그러면서 너의 아이덴티티를 버리지 않고 갈 수 있는 음악을 그려라.” 그래서 저는 열심히 그렸고 저에 대해 애정 가진 분들과 함께 계속 고민했고 외국에도 많이 보내봤고요.
근데 다들 하는 얘기가, 시장성은 없다. 평론가들은 좋아할지 모르지만 시장성은 없다, 그래서 좌절도 많이 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많은 써포트를 받고 순수하게 음악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꼭 대중성이라는 걸 따라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죠. 그게 계속 테마였어요. 왜 그런지 일본에서도 평론가들이 되게 좋아해줬는데.
그래서 오히려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역수입되셨죠.
아무튼 그래서, 넌 안 팔린다, 너는 고흐다, 죽은 다음에 500년 후에 유명해진다는 얘기를 사람들이 악담처럼 하고. 그래 내 업보인가보다. 하지만 그게 이루어졌든 안 이루어졌든, 우타다 히카루 사건이 있었건 없었건, 저는 그때 시야가 많이 넓어졌어요. 좋은 음악은 국경을 넘을 수 있다,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야지.
그래도 어느 정도 국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지원해준 것이 아닌가요?
한국의 리얼리티와 일본의 리얼리티가 다른 게, 일본에서는 내가 국내에서 흘러넘치면 그대로 세계라는 의식이 있어요. 그건 정말 다른 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네가 여기서 조금만 열심히 해서 흘러넘치면 그대로 세계니까 열심히 해라.” 우리 입장에서는 대단한 진출인 것 같고 신기록을 세우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들의 리얼리티 안에서는 약간만 노력하면 쉽게 말해서 내가 인천에서 있는 밴드인데 약간만 노력하면 서울에 올 수 있듯이, 그들은 일본에서 10만 장 정도만 팔리면 그 돈과 그 네트워킹으로 충분히 세계로 나갈 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도 우리가 그런 느낌을 갖고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내가 이 나라에서 조금만 흘러넘치면 바로 세계 시장이다, 라는. 그랬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쉽게 그 말을 했던 거예요.
지금도 가 보면 그래요. “국내냐 국외냐”가 아니라 “국내냐 세계냐”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워, 그러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웠어요. 얘가 국내에서만 좀 뜨면 금방 보낼 수 있다. 근데 문제는 국내에서조차 뜨기 어려웠던 거죠. 그때만 해도 거의 계은숙 씨 같은 분들밖에 없었고 활동하는 한국인 아티스트는 아무도 없었고 한국말로 하는 미친 사람도 저밖에 없었고. 그러니까 악조건들이 많았죠. 그래도 그 안에서 음악성을 인정받았으니까. 내부 안에서도 뜬 곡도 ‘어기야 디어라' 한 곡? 그래서 그게 차트에 올라 가지고 여기저기 다녀보고 삿포로 가서 밥도 먹어보고 그랬던 거예요.
근데 20대 때라 너무 고집이 세서 그때는 계속 나 죽은 다음에 인정받을래,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지금은 그런 생각 안하지만… 그 부분에서는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거니까.
나에게 좋은 음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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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딘 하루>부터 시작해서 예전부터 이상은 씨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잖아요. 노래를 들으면 항상 자신이 어떤 상황들 ‘사이'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많이 드러내시는 것 같아요. 경계인, 보헤미안과 같은 느낌. 스스로 말하는 자신의 성향은 어떤지 궁금하거든요.
아주 어렸을 때 일이라 잘 기억이 안 나고요.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잘 생각도 안 나고. 암튼 그때그때 자기를 사로잡는 고민이 있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그때 저는 한국으로 돌아오기도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와봤자 담다디, TV 나와서 노래 불러야 하고. 그렇게 안하면 뭘 할 수 없으니까요. 쉽게 말해서 일자리를 잃은 거예요.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그럼 일본에서는 어땠냐 하면, 사실 일본에 저 같은 케이스가 그렇게 와 있다는 게 되게 슬프거든요? 그건 할 짓이 아닌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죠. 무슨 동료가 있거나 먼저 와 있는 선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국외로 다니시면서 한국을 염두에 두시진 않으신 건가요? 한국에서 내가 어떻게 비춰질 거라든지.
그걸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닌데 염두에 두었던 건 극히 소수예요. 저하고 주파수가 맞았던 사람들이라고 해야 되나요. 그 와중에 일본에서 활동할 때도 한국에서 응원하는 대학생들, 주로 대학생들이었는데 저와 공감하고 있던 사람들은 많지는 않았고 저는 그런 생각을 했죠. 이 친구들이랑 같이 가자, 나머지 사람들은 내가 어떤 행보를 하고 있는지 알 필요도 없고. 소수의 매니아면 된다, 한국 전체를 신경 쓸 필요는 없죠. 제가 무슨 대표 가수도 아니고.
전 이번 앨범 <로만토피아>가 마니아적인 걸 뛰어 넘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더 편한 느낌의 대중적인 앨범이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저는 솔직히 말하면 그런 것들은 억지로 끄집어내려고 먼저 생각을 하고 곡을 쓰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냥 곡이 나오면 그걸 쓰거든요. 그게 무슨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딱딱한 걸 별로 안 좋아하고. 컨셉을 먼저 세워놓고 하는 경우도 별로 없고 그냥 자연스럽게 나오는 곡을 만들어요. 그리고 제목도 나중에 붙이고.
그렇다면 <외롭고 웃긴 가게>도 컨셉을 잡고 작업하신 게 아닌가요?
네, 아니에요. 저는 그게 제일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신이 지금 처한 공간이나 상황과 같은 요소들이 음악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 같아요. 이번 앨범에서 구체적으로는 홍대 앞이라는 공간에 대한 애정을 표하신 것 같은데 여기 이곳에 내가 안식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평온함이 음악에도 영향을 끼치던가요?
그것도 한때죠.(웃음) 영원한 건 없죠. 또 가야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런 건 있어요. 제 매니저 중에 홍대 예술학과 다닌 광주 출신의 김기정 씨라는 분이 있어요. 그분과 매우 의식 있는 대화를 10년 동안 서로 나눴거든요. 이놈의 매니저가 맨날 잡아오는 일들이라는 게 인권 그런 거 있잖아요. 나도 오랫동안 많이 공감하고 좋고. 어느 날 느낀 거예요. 재미없다. (웃음) 이거 정말 재미없다. 너무 오래했다. 맨날 페미니즘, 인권. 근데 그런 거 자체가 뭐라고 해야 할까, 이즘이 잘 익어서, 이즘인지도 잘 모르겠고 잘 섞여 있어서 뭔지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좋은 얘기였어, 이게 좋고 자연스러운 건데 우리는 너무, 막 이거잖아요. (손을 주먹 쥐고 흔들며) 그래서 이즘 재미없다. 그래서 더더욱 이번 앨범 만들 때는 좀 달라졌죠.
또 미국 뉴욕에서 공부할 때는 아주 거창한 게 좋았거든요. <공무도하가>처럼 스펙터클하고 뭔가 거대한 느낌을 좋아했어요. 근데 영국에서 기숙사에 한 1년 머무르다 보니까 점점 변했어요. 사이즈 큰 얘기는 이제 별 관심도 없고, 일상적이고 소소한 게 좋게 느껴지고. 또 제가 요즘 듣는 음악들이 트래비스 Travis 라든가 다프트 펑크 Daft Punk, 케미컬 브라더스 Chemical Brothers 등등. 되게 심플하거든요. 일상적인 것들을 다루고 굉장히 심플한데 사운드가 굉장히 진보적인 거죠. 그게 확 좋은 거예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 것 같아요. 삼십 넘으니까 그런 게 좋아지고 그러다 보니까 음악도 소품스럽게 되고 과장되게 얘기하는 게 별로. 그저 담담하게, 그런 게 좋아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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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예전부터 페미니즘 축제가 있다고 하면 꼭 이상은 씨가 있었어요. 그때 공연하는 이상은 씨를 보면서 그녀는 이 축제에 와서 어떤 기분으로 노래를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뭐라고 해야 할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아티스트들은 자연스럽게 뭔가가 나오는 거지, 머리로 뭘 어떻게 해야겠다, 그러는 순간 재미가 없어지거든요? 자연스럽게 한 것들이 아, 그런 의미가 있었구나, 한다든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때 그랬었구나 하는 게 저는 더 좋더라고요. 그게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때가 뭐 나쁘고 좋다 그런 건 아닌데. 솔직히 라이브를 할 수 있었던 무대가 그런 곳들밖에 없었고, 또 그 공연의 취지에 제가 공감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요. 예를 들면 제가 존경하는 분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성운동가들이거든요. 이혜경 선생님도 참 좋고. 조한혜정 선생님과도 친분이 있는데 참 좋고. 또 하자 센터에 친구가 선생님으로 있어서 가서도 많이 보고. 어릴 때부터 듣는 소리들이 다 그렇고.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거기서 어울리게 된 거죠. 아니면 방송국 가서는 혼자 또 안 맞고. 그렇게 재미있었어요. 또 재미있냐 없냐 그런 차원을 떠나서, 저 혼자만 현실로부터 벗어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좀 더 자유롭게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죠. 내가 페미니스트 누구를 존경하고 또 공감하고 있으니까 그런 얘기를 해야 돼, 이런 게 너무 재미없고. 그럼 여기서 벌써 너무 많은 이즘과 담론과 당위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뭔가 틀이 있잖아요. 그런 틀에 안 빠지고 싶으니까 그냥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걸 표현하고 싶다, 이제는. 좀 더 털어버리자.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뭔가 바뀌는 건 없거든요.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에게 있어서 좋은 음악을 해야지, 하고.그리고 또 하나는, 제가 여성 아티스트잖아요. 예를 들어서 <공무도하가> 앨범 만들 때 나만의 아이디어가 100퍼센트였다고 말할 수 없고 프로듀서들이 옆에서 많이 도와 주셨는데, 그때 남성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처럼 누가 아무도 안 건드리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 그러면 여성적인 감수성이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그건 남자들이 할 수 없는 일이고 아까도 어떤 여성 잡지의 기자분하고 인터뷰하고 잡담을 나누는데, 자연스럽게 여성 문제 얘기가 나왔어요. 홍대 근처에서 액세서리 가게 하는 후배들이 있는데 그 친구들하고 술을 먹고 얘기를 하는데 가난을 못 벗어나는 거예요.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너무 먹고 살기가 힘들대요. 너무 힘들대요. 애가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가지고 먹고살기 힘들다고. 학교 다닐 때 이 친구가 저 친구보다 성적이 좋아도 대기업에서는 여성을 거의 안 뽑고. 뭐 그런 식으로 해서 이등시민인 것처럼 소외되고 빠져 있고.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든 생각이, 여성들만이 할 수 있는 거, 남성들이 그 자리를 장악하고 있으면 다 치워버리고 밀어버려야 되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지금은 제가 예쁘장하게 노랫말을 쓰고 예쁘장한 멜로디를 쓸 수 있는 건, 예쁘장하다는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여성이니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걸 어떻게든지 끝까지 유지해가야겠다, 그걸 살려야겠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여성이기 때문에 잘 할 수 있는 걸 그 섬세함을 살려나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성 아티스트라고 스스로 칭하시는데, 남들이 불러 주는 게 아니라 언제부터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하셨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아티스트라는 말을 잘 안 쓰는데 일본에서는 되게 흔한 얘기거든요. 그렇게 일부러라도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여성들은 땅따먹기도 잘 못 하고 그렇잖아요.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불러줘! 하지 않으면 평생 가야 담다디겠구나 하는 걸 언제가 알게 된 거예요. 내가 내 스스로 어떻게든지 해야...... 가끔은 저에게 공격이 들어올 때가 있어요. 기자를 만났을 때. 특히 스포츠 지 같은데. 아 씨 너무 이상한 걸 물어보고. 그럼 무조건 난 아티스트라고 그랬어요. (웃음) 그러다 보니까 와전되어서 쟤는 자기 입으로 아티스트래 이렇게. 나는 내 음악을 만든다고, 그러면 막 안 들어요. 요즘은 그래도 괜찮아졌어요. 한번은 누구 못지않게 지성적인 한 아저씨를 만나고 깜짝 놀란 적이 있는데. (웃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때 그런 얘기를 한 게 떠돌면서 쟤 이상한 애야 하기도 했죠. (웃음)
혹시 오해를 많이 사지 않으셨나요? 스스로 아티스트라고 그렇게 자기 선언하는 게 건방져 보일 수도 있잖아요. 지금은 좀 나아졌을지도 모르지만 예전만 해도.
글쎄요. 되도록이면 건방지다는 말은 정말 듣고 싶지 않은 게, 왜냐면 나는 내 생각을 말하는데 왜 남들이 난리야. 야 너 건방져 그러면 네가 용기가 없는 거지 너도 할 말 많잖아 그러고 싶거든요. 다들 생각은 하고 있는데 말도 못하고. 말하는 분위기가 아닌 게 문제지. 생각이 없어서 말 안 하는 게 아니라 말했다가 나보고 건방지다고 하면 어쩌지...... 근데 그게 무슨 건강한 건지, 남을 욕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내 음악 만들어서 아티스트라는데 스포츠신문 기자랑 싸우고. 그럼 맘대로 해, 그러는 거죠. 저는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모습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래서 노출되는 게 두렵기도 하고. 그럼 저는 단순해서 막 이렇게 싸우거든요. 아님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하고 그냥 얘기를 해버려요. 뒷말들이 많겠지만, 그래도 제가 악의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것도 음해하려는 사람들은 없고, 조금은 조용히 하지, 너 너무 튄다 조금만 조용히 하지, 그런 뉘앙스였던 것 같고. 그리고 제가 막 까불다가 펀치를 맞은 적도 많긴 해요. 왜냐면 저는 23세기라면 여성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이런 건데. 왜 자기가 생각하는 걸 말 못 해야 되나. 내 말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뭐 큰 문제는 없었어요.
23세기를 사는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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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리채(Lee Tzsche)라는 이름은 안 쓰세요?
일본 쪽에서는 아마 계속 사용할 거예요.
그럼 리채는 도시바EMI에서 프로모션의 차원에서, 세계화의 전략에서 만들어진 이름인가요?
그건 글로버제이션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예요.
타이포그라피가 굉장히 예쁘더라고요. 리채라는 단어를 폰트로 써 놓은 게.
같이 음반 작업한 다케다 하지무 상이랑 머리 써서 만든 거예요.
굉장히 쇼킹했어요. 이건 국내적인 감수성이 아니다, (웃음)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데. 리채를 계속 쓰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이상은으로 불리고 싶으세요?
전 별로 관심 없어요. (웃음) 상관없어요.
또 하나, 전 이상은 씨가 어떤 아이콘이라고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너무 늙었죠.(웃음)
국내에서 이상은 씨처럼 언더와 오버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 한 음악인이 없는 것 같고, 이상은 씨는 그렇게 시스템 안과 시스템 밖을 자유롭게 넘나들 만한 힘을 가진 것 같고. 그렇다면 이제 그런 자신을 즐길 수 있는 상태까지 가신 건지?
오늘도 다른 곳에서 그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고민을 하면서 왔는데… 아, 이제 또 떠날 때가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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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이라는 틀이 싫어서 떠났다고 하셨는데, 이제 다시 돌아오니까 보헤미안이라는 틀이 잡힌 거죠. 그런 것에 대한 부담은 없으세요?
전 남들이 뭐라 하든지 상관 안 하거든요. 저는 그런 차원에서는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차피 내년 1월에는 떠나려고 하거든요. 가야 하는 이유를 찾고 있어요. 난 이래서 가야 돼. 그 결정적인 이유를 오늘 하나 발견했는데, 내가 가야지 여성 후배 아티스트들이 클 수 있을 거야, 내가 너무 혼자서 앞길을 막고 있는 것 같아. 그럴 수도 있는 게 너무 한 사람만 집중을 받을 수도 있잖아요? 누군가 피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가끔씩 없어져야 그 사이에 많이들 자라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하고.
제가 추구하는 건 그래요. 어떤 틀이나 속박이든지 그 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사람들이 규정하려고 하는 게 너무 싫거든요. 보통 한 개인을 규정하려고 하면 잘 안 되잖아요. 누가 어떻게 감히 말할 수가 있어요. 1년마다 바뀔 수도 있고.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데. 그런 게 얼마나 무서운지 어렸을 때 봤거든요. 제가 뭘 해도 담다디인 거예요. 사람들이 뭘 갖다 붙여서 저 사람은 어떨 거야, 한다는 게 사실은 굉장히 스트레스 받는 일이고 무서운 일이에요. 저 같은 경우는 중요한 건 작품이지 내가 아니다, 작품이 정치적인 성향이 있든 여성적인 감수성이 있든 그 작품이 뭐든 간에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거고 나는 숨고 싶고 도망가고 싶고. 꺼리는 것도 많고 노출을 많이 안하려고 한다든가. 저는 보통의 개인만큼의 자유가 저한테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무도 나를 규정하지 않을 자유. 그게 어떨 땐 조금 힘들기도 하고.
외부에서 이상은 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로 그게 본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타인의 시선이 보는 게 어쩌면 본인이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솔직하고 리얼리티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것도 자신의 한 부분이겠죠. 그렇지만 제가 왜 제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느냐면, 물론 이미 많이 드러났겠지만 난 그게 많이 괴롭고 신경이 쓰인다는 거예요. 물론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저는 되도록 피하고 싶은 거고…
살아가는 방식 중의 하나인가요?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요. 어떨 땐 작품을 알리기 위해 나를 노출시켜야 할 때도 있거든요. 그때는 필요하니까 하지만 되도록이면… 제가 좀 내성적인 부분이 있는 거예요.
음악이라는 게 그것만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렇죠, 그런 걸 제가 못해서 되게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상은 씨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상은이라는 한 사람과 감수성이 통한다는 느낌을 받으며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분명 많은데요.
음, 그런데 전 음악만 듣고 저를 만났다가 실망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거든요. (웃음)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건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한다는 의미보다는 자신이 도구가 되어서 만들어진 음악이죠. 어떻게 작가와 작품이 일치할 수 있겠어요. 그게 잘 이해가 안 가는 게, 상상한 걸 얘기하는 거지 나를 얘기하나요? 물론 자기 목소리도 있겠지만, 저는 음악을 만들 때 어떤 상상이 떠오르거든요. 거긴 제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근데 앨범이 나오면 프로모션해야 되니까, 그럴 때 가끔은 아이씨, 답답해, 하는 거죠. 근데 그냥 제 성격상 앨범만 내고 사라져도 사람들이 아, 나왔구나, 하고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단 얘기죠. (웃음)
아까 아이콘 이야기도 나왔지만, 자신이 어느 순간 갖게 된 힘을 이용해서 뭔가를 벌여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요? 이를테면 후배들과 모여서 어떤 프로젝트를 만든다든지 또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서 한데 모여 공동 작업을 시도한다든지.
만약에 제가 남자였으면 그걸 정말 잘 이용해서 열라 잘했을 것 같은데, 혼자 엔터프라이즈 만들고 별짓을 다했을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지만, 근데 전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홍대 앞에 나름대로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중에 찐빵이라고 하는 친구가 있어요. 사진, 민화도 하고 작은 소품가구도 만드는 친구인데, 그 친구와도 공동체가 뭐냐, 하는 이야기를 해요. 뭐 먹고 사는 걸 생각하기 쉽지만 그 친구는 그러더라고요. “정신적인 거다. 난 서로 고차원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를 추구한다.” 그것도 재밌네, 꼭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안 보이게 서로 도와주고. 한 친구네 집 고양이가 이층에서 떨어졌어요. 달려가서 고양이 돌봐주고. 느슨한 조직이라고 해야 하나. 모이지도 않고. 그러나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죠. 가끔은 그 이상으로 확장시키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다가도 그 찐빵이라는 친구가, “그런 건 아닐 것 같아, 상은. 느슨하게 서로 그냥 돕고 그러는 게 어때?” 그래 그러자. 그런 얘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이대로 각자 느슨하게.
전에 황신혜밴드 김형태씨 인터뷰를 봤는데 그 분은 개인적인 야심이 있으시더라고요. 자기가 한국 땅의 예술가로 살면서 예술가로서 기여하고 싶은 게 있다. 한국이라는 사회에 내가 예술가라는 직함으로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저는 무조건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한국에 도움이 된다.
그래도 사람들이 이상은 씨로부터 기대하는 게 있을 수 있는데요.
아버님이 3년 전에 설날 선물로 「공산당 선언」을 주셨는데, 그렇게 현실을 바꿔야지 하는 사람이 있고 현실 안에서 어떻게 움직일까 하는 사람이 있는 거죠. 저 같은 물고기자리의 꿈쟁이는 저 혼자 23세기거든요. 뭘 바꾸겠다는 생각도 없고 그냥 저 혼자 23세기의 좋은 대한민국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을 해버리거든요. 난 그게 답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다 사명이 있겠지만 혼자 퍼포먼스를 해야 될 때가 있잖아요. 음악을 통해 어떤 퍼포먼스를 할 때 저 혼자 모든 문제가 해결된 23세기 한국의 젊은이인 것처럼 행동해요. 그것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다른 거잖아요. 저는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된 세상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요. 문제를 안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제를 보면 그렇게 돼요. 그 문제가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이미 그런 문제들이 다 해결된 한 200년 후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식으로 얘길 해서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든다든가. 그런 게 훨씬 재미있는 것 같아요. 문제를 말하는 것보다 어떤 상태를 보여주는 것.
미래를 사는 것?
그렇죠. 언제나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해야 될 때면 아방가르드하게 진보적으로 이미 모든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상상하면서 보여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예술가니까요. 딱 그 그림을 보여주는 거죠. 그건 다 역할이 다른 거니까. 이게 문제야 저게 문제야 하는 경우는 글 쓰시는 분들이 해야 한다고 해야 할까. 그림이든 음악이든 그렇게 보여주는 방법이 저한테는 맞는 것 같아요. 좋은 그림, 좋은 상태, 좋은 그 어떤 것, 환상적으로 보이는 것… 홍대 앞도 혼자 그렇게 보여요. 그럼 그걸 표현하자. 좋은 상태를.
그럼 그 비전이 꽤 잘 이루어졌다 싶은 음반이나 곡이 있나요.
언제나 나름대로 그걸 추구했어요. 내 비전이라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일단 <외롭고 웃긴 가게> 만들 때도 저 혼자 21세기 사람이었고 <공무도하가> 만들 때도 저 혼자 22세기 사람이었고. 상상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내가 22세기 사람이라면 하고. 미래에서 메시지를 보낸다고 생각하고. 그럴 때 즐거우니까요.
음악에 관한 로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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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쯔라는 분이 운영하시는 개인 팬 사이트(http://www.mizzk.com/lee-tzsche) 아세요? 거기서 읽은 건데, “예술가라는 것은 진실에 관해 소요하는 사람이다. 그것에 가장 가깝게 근접할 수 있는 것이 음악”이라고 하셨더라고요. 그걸 음악이라고 생각하신 개인적인 경험 같은 게 있나요?
자기가 특별히 그렇게 안했는데 그냥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운명이라고 해도 되고 팔자였다고 해도 되고 어찌어찌하다보니까 앨범을 내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주위에서 막 도와주겠대요. 그림 그린다고 할 때 도와주겠다는 사람 한 명도 없고 (웃음) 딴 거 하겠다고 할 때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데 음악 하겠다고 그러면 그렇게 사람도 붙고 도와주겠다고 하고.그리고 누구나 하늘이 내린 직업이란 게 있잖아요. 너는 이 직업을 통해 세상을 살아라, 그런 건가. 전 노래하다 혼자 필이 가서 진짜 음악은 좋은 거야. 음악은 진짜 멋있어, 이렇게 느낀 적이 많거든요?
음악의 힘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게는 어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가장 낯익은 방법이에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됐어요. 뭔가가 굉장히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그 자체가 인간에게는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어차피 안 죽는 사람 없고 늙지 않는 사람 없고 내일 일을 아는 사람 아무도 없고. 제가 이제 정치적인 이야기들이나 이데올로기적인 이야기를 좀 피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게 싫어서가 아니라 그런 얘기하는 사람들 되게 많잖아요. 그걸 조금 더 아트적으로 이야기하면 뭔가 좀 아름다운 세상이었으면 좋겠어, 그거 아니에요?
여러 가지 예술의 방식이 있었을 텐데 굳이 음악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좀 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요.
음악은 그 안에서 뭔가 빙글빙글 도는 듯한...... 형체가 뚜렷하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멋지게 얘기하고 싶을 때는, 사람의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이 있는 것처럼 음악이 존재한다, 마음의 질감과 음악의 질감은 같은 거다,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했는데, 그런 느낌? 영적이라고 해야 되나, 눈에 안 보이는 데 있죠. 다른 것들은 3차원에 존재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근데 있는 거죠. 저는 그게 되게 매력적인 것 같아요. 없는데 있는 거예요.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있다고도 할 수 없는데 있는. 그리고 그 자체가 계속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은.
저는 또 궁금한 게, 사람들에게서 딱 그 마인드를 끄집어낼 수 있는 작곡가들이 있잖아요, 어떤 음을 딱딱 써서 어떤 마인드를 동시에 다 같이 갖게 만든다는 게 저는 너무 신비롭다고 생각해요. 참 이상하다, 같은 음악을 들려주면 대부분 비슷한 감흥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참 신기하다 싶어요.
지금 말씀을 들어보면 다른 기사를 통해 봤던 이상은 씨와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예, 그럴 거예요 아마.
저희가 이상은 씨를 가장 직접적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은 음반이니까 시간이 지난 다음에 되돌아 봤을 때 자신이 발표한 음반들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기왕이면 케이스바이케이스로 말씀해 주시면.
간단하게 얘기하면, 지금은 사실 내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만약에 로또가 당첨이 돼서 멋대로 음악을 해도 된다는 상황이 주어진다면 과연 내가 어떤 음악을 할까 생각을 해 보면, 아마 비밀스럽게, 쫙 푸는 게 아니라 무슨 금서처럼 구하기도 되게 어렵고 한정판도 아니고 비밀리에 연락이 되면 그때 한 장씩 한 장씩 준다든가, 근데 그걸 딱 들어보면 뭔가 알 수 없는 그런 걸 해 보고 싶거든요. 꼭 현실 안에서 이 시대에 기능을 하게 되는, 기능적으로 움직이는 거 말고, 되게 사치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만, 내 영혼이 태어나서 봤던 것들이라든가 그런 거 있잖아요. 이런 걸 기록으로 남겨 놓는 거야. 이게 실용적인 게 아니라 아무도 안 하고 있지만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이런 걸 하고 싶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게 20대 때 그런 음악들을 하면서니까. 음… 좋았던 것 같아요.
예전에 책을 한 권 내셨잖아요. 요즘 많이 인용되던데 “음악은 납작했던 나를 부풀리게 하는 것”이라는 말, 되게 와 닿았었거든요. 물론 옛날 음반도 좋아하지만 이번 음반이 정말 러브러브하고 나를 부풀리게 해 주는 음반이라서 너무 좋았거든요. 개인적으로 이번 음반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 그 음악에 대한 정의와 딱 맞아떨어지는 음반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지금은 청자들을 되게 많이 의식하게 됐어요. 20대 때보다. 실용성까지는 아니지만 저 혼자 좋은 생각이라고 느꼈던 건,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는 사람이 내 음악을 듣고 기운이 났으면 좋겠어, 이런 거 있죠? 들었을 때, 어우 어려워, 짜증나, 이런 게 아니라. 그래, 오늘도 하루가 잘 끝났구나, 이런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가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만든 음반이었어요.
거기에 딱 맞는 음반이었어요.
저는 사실 그게 쉬울 줄 알았거든요? 전에는 꿈자리 사나운 23세기 판타지 이런 걸 했으니까. 근데 되게 어렵더라고요. 암튼 공부할 게 되게 많다는 것도 배웠고.
그게 상업적이지 않고 지금 트렌드하고 많이 닮아 있는 포뮬라한 대중가요의 공식을 따르지 않고 미묘하게 다른데 순수해 보이면서도 사람들이 그 음악을 듣고 아 새롭다고 느껴야 하면서 동시에 쉬워야 하면서 사운드는 진보적이어야 하는! (웃음) 그런 걸 해야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죽는 거예요. 아, 나 어떡해. (웃음) 그래서 힘들었어요. 그래도 저 스스로가 그 모든 요소들을 끝까지 어떻게든 했어, 라고 생각했거든요? “혹시 다르게 들려요?” 해서 “그렇다”고 하면 아, 신난다! 그러고. 또 그동안 해 온 디스코그라피하고 또 연결이 되면서도 성숙해 가는 과정도 보여 줘야 하니까… 정말 힘든 것 같아요.
순수한 대중성이라는 게 존재하기가 힘든 거 아닐까요?
순수한 대중성이라는 게 요즘은 발견하기 어렵지만 80년대 제가 고등학교 2,3학년일 때 ‘어떤 날'이라든가 ‘시인과 촌장', ‘들국화' 등이 활동하는 음악 씬이 생겼어요. 작가가 자기 노래를 하는. 그리고 그 곡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산업 시스템으로 곡이 가수에게 전달되는 게 아니라 작가들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순수하게. 순수했다고 생각해요. 그 씬이 만약에 건강하게 계속 자라났으면 지금 참 좋았을 텐데. 제가 아는 바로는 어떤 정치적인 이유로 그런 음악이 억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게 좀 낭만으로 들리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거기에서 콜드플레이 Coldplay가 들리고 트래비스 Travis가 들리거든요? 그 계보가 완전히 없어져서 자꾸 드문드문 계보들이 잘리는 느낌. 한대수 씨 있고 비었다가 80년대에 뉴 포크식의 그런 붐이 있다가. 그때도 라디오에서 그랬어요. 이거 르네상스라고. '그것만이 내 세상'이 나오는데 다들 비밀스럽게 야, 이거 좋다고 들어보라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그러면서 저도 음악이 하고 싶었거든요.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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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앨범 <로만토피아>를 들으면서 가진 자가 이야기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어요. 행복하다는 게 같이 행복한 것도 있고 위로가 되어 행복한 것도 있는데, 이번 앨범에서는 자기 자신이 행복한 느낌이 너무 강한 것 같아서요.
몇 년 후에 들어보면 아 나 그때 왜 그랬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님 이 길로 쭉 걸어가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아직은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한 5년 후쯤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돌아가든 일직선으로 부딪히면 가든 가는 그 지점도 미지수 상태인가요?
예전에는 아, 나 간다, 이런 식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별로 없고 그냥 최선을 다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면 모든 게 다 자연스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억지로 신기록을 세우겠다 이러지 않고 그냥 작품만 꾸준히 좋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그렇게 생각이 바뀌었거든요. 어른이 된 건지도 모르겠는데. 근데 실제로 또 보니까 그렇기도 하더라고요. 나는 지금 이런 음악이 좋아, 나는 이런 음악을 들었을 때 행복해, 그러니까 사람들도 좋아해줬으면 좋겠어. 열심히 그냥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말든 그냥 담담하게 작업을 계속 해 나가고 싶어요. 그냥 계속 앨범을 내면 좋겠다는 그런 상태.
내년 초에는 어디로 도망가세요?(웃음)
글쎄요.
꼭 가셔야 하나요?
친구들 있는 데 가겠죠. 친구네 집에 빌붙어 있겠죠. 아무것도 계획이 없어요. 아무것도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해놓고 싶은 마음은 없고. 그냥 다 열어 놓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다 재미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즘은.
그녀는 또 다시 떠날 것 같다는 말로 인터뷰를 맺었다. 그러나 언제 돌아올 거냐는 질문은 필요 없었다. 그것은 분명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라기보다 이번엔 우리가 그녀를 떠나게 만들진 않았을 거라는 기묘한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 우리는 언제라도 홍대 앞 피카소 거리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꺽다리 이상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떠나기 전까지 그녀는 이곳 대한민국에서 도도하게 예술을 이야기 할 것이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감수성을 음악에 묻혀낼 것이다. 정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그녀가 이제 더 이상 ‘보헤미안'일 필요는 없다. 자유롭다는 것마저 강박이 될 수 있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그녀가 이제 더 이상 매끄러운 공간을 부유하는 자아에 목말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그녀를 무엇으로 규정짓건 간에 그녀는 여전히 23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일 뿐이고 23세기의 꿈을 그려내는 아티스트일 뿐이니까.
음악은 구조를 알 수 없는 원형이라고,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해서 아름답다며 음악을 설명하던 그녀의 얼굴을 기억한다. “노트 속에 소녀적인 마음을 처박아 두고 아무도 안보는 데서 노래연습 할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말하던 ‘담다디 소녀'의 얼굴이 그러했으리라 믿는다. 그녀의 감성을 그녀를 둘러싼 일상 안에서 표현할 수 있는 여유는 ‘보헤미안'이라는 이름으로 얻어지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녀가 아주 먼, 지명도 알 수 없는 어느 무국적 공간 안에서 <외롭고 웃긴 가게> 같은 음악을 외롭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지만, 내가 속한 현실의 땅에 함께 발을 딛고 선 이상은의 음악은 그 때 그 음악보다 더 따뜻하고 더 진솔하리라 믿고 싶다.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은 진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진실, 음악에 대한 진실 등 그것에 근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표현하는 것, 알고 있는 것을 실제로 해냈을 때의 느낀 기쁨이 가장 깊은 것이 음악이었다.” (이상은)
우리는 <공무도하가>에서 <외롭고 웃긴 가게>로 이어졌던 그녀만의 감성의 파고를 사랑했다. 그것은 대한민국 어느 여가수도 가지지 못했던, 쉽게 측정될 수 없는 깊이와 진폭을 가진 감성이었다.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녀적 감수성으로 삶을 나른하게 관조하던 그녀의 음악은 이제 그녀의 판타지를 담아내던 도구를 넘어서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담는 그릇으로 진화해 가는 듯하다. 그러나 무한한 해석의 여지를 주던 감성의 스펙트럼이 작아졌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여전히 어떤 진실에 근접하려 노력하는 아티스트이고, 이제 근접해야 할 그 진실의 폭이 더욱 넓어졌을 뿐이니까. ‘담다디'를 포함해서. 그녀가 살아가는 현실의 공간과 사람들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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