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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생태환경

지금은 잊혀진 국도를 위하여 - 추곡~웅진 간 舊46번 국도

by 내오랜꿈 2007.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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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잊혀진 국도를 위하여
[길위에서] 후천성 샛길 증후군 환자의 여행길4 

노동효 / 자유기고가
출처 : <컬쳐뉴스> 2007년 11월 24일 




나는 지도에서 사라지고, 기억에서 잊혀지고, 기계문명으로부터 버려진 국도 위를 지나고 있었다. 소양호를 끼고 물 흐르듯 미끄러지는 길이 모롱이를 만날 때마다 넉넉한 여백을 안고 있는 동양화 화첩의 새 폭(幅)을 넘겼다. 서울(양구)방향 이정표가 新46번 국도 위로 옮겨지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기계문명으로부터 버려진 까닭에, 아무도 다니지 않는 추곡~웅진 간 舊46번 국도. 

내가 로드 페르몬에 중독된 후천성 샛길 증후군(Acquired Byroad Syndrome) 환자가 아니었더라면 늙은 어부 한 명 눈에 띄지 않는, 소양호 진경산수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없었으리라. 은둔하는 절경의 겨드랑이에서 새어 나오던 체취(Road Pheromone)를 맡던 순간 핸들을 급히 샛길로 꺽지 않았더라면, 올림픽 구호마냥 ‘보다 더 빨리! – Citius!’의 삶을 구축하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만들어지고 있는 ‘터널에서 터널로 오가는 삶’에서 한번쯤은 일탈해보지 않겠니? 하고 킬킬거리던 샛길의 웃음 소리를 듣지 못했더라면 말이다. 

나는 이 지면을 빌려 <길 위에서>란 여행기를 기고해왔는데, 누적된 졸고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내 글이 여행기로써 갖추어야 할 격식과 양식을 그다지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가는 길'은 이러저러하고, 그곳엔 이런 ‘음식점’이 있고, 저런 ‘휴게소’가 있어서 식사와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식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어버린 데에는, 필자의 글에 혹 목적이 있다면 그것이 여행지를 안내하는 데 있지 않고 단지 독자들로 하여금 길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부추기는데 있으며, 한편 은둔하는 절경이 이런 저런 경로로 알려지고 나면 소수나마 '깊은 맛'을 오감으로 느끼고 돌아가던 장소가 다수가 몰려들면서 '얕은 맛' 조차 못 느끼고 돌아서는 장소로 변해버리는 까닭이다. 소문은 언제나 사람들만 몰고 오는 것이 아니라 개발의 포크레인과 유흥업소와 놀이공원을 함께 데리고 오므로. 

그러나, 이번 글에서 나는 여행기로써 양식과 격식을 갖춰 ‘가는 길’을 아주 소상히 안내하고, '휴게소’와 ‘음식점’에 대해서도 아주 소상히 밝힐 생각이다. 말하자면 이건 안내문이자 초대장 같은 것인데, 일단 그날 아침에 만난 야릇한 고양이 이야기부터 시작하겠다. 

요기(Yogi) 같은 길고양이 한 마리

낯선 곳에서 잠을 잘 때면, 이 나이에도 종종 몽정을 하는 나는 그날 아침, 다행이구나! 하고 마른 팬티를 아쉽게(?) 느끼며 침낭 속에서 빠져 나왔다. 밤새 그 누구도 <광치자연휴양림>에 무단잠입한 우리들을 찾아오지 않았고, 다만 어제 무단잠입하는 모습을 목격한 관리인의 눈을 피해 빠져나가는 길만 남아있었다. 물론 광치령을 내 늙은 로시난테를 타고 넘어갈 수 있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날 아침 혼자 햇살에 훤히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S라인의 고갯길 깊숙이 들어가 본 결과 조심해서 지난다 하더라도 무리일 듯 했다.억지로 넘다간 나뭇가지에 옆구리가 긁혀 상처투성이가 되는 정도에서 끝날 게 아니라, 내 늙은 로시난테의 배가 갈라지겠구나! 

차로 다시 돌아온 나는 계곡으로 내려가 세수를 하고, 한 모금 물을 들이켰다. 첩첩산중 논밭도, 축사도 없는 물길을 따라 내려온 청정수는 웬만한 약수 저리가라! 하고 목젖을 타고 내려갔다. 찌르르 퍼지는 청량감. 산은 깊고, 물은 깨끗하니 얼씨구나 좋을시고! 나는 되(지)도 않는 노래를 즉흥으로 지어서 불러댔다. 그 남자 작사, 그 여자.....없다. 차문을 열고 침낭을 개는 사이 L형도 부시시 이불을 털며 일어났다. 

어,벌써 해 떴네? 사람들 눈 뜨기 전에 나가야 할 텐데. 무단잠입은 좋았는데, 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 할 일이 자못 염려스런 아침 인사를 하며, L형은 이불 개고, 트렁크 열고, 이불을 쑤셔 넣고, 보조석에 앉았다. 지금이 딱 좋을 시간이에요. 식사 준비하고 밥상에 앉을 시간이니, 우리가 지나가도 모를 겁니다. 과연 그럴까? 물론 평일이고 보면 손님도 없고, 지나가 봐야 무단잠입한 우리 차량밖에 없을 그런 판이었다. 하하하, 믿어보세요. 관리소에서 지키고 있으면 어쩔 거야? 이미 볼 것 다 보고, 잘 것 다 잤겠다....웃는 얼굴에 침 뱉기야 하겠어요? 하하하 

그러나 웃을 일도, 침 뱉을 사람도 없었다. 식사 준비하고 밥상에 앉아 TV 보고 있을, 딱 그 시간이었으니까. 거 봐요, 제 말이 맞죠? 그렇게 기분 좋게 <광치자연휴양림>을 빠져 나오는데, 어 저 녀석은 뭐야, 밤새 저 자리에 앉아 있었단 말이야? 지난밤 마주쳤던 고양이 한 마리가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앉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요기(Yogi)처럼. 옆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리고,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녀석은 도망가지 않았다. 올 녀석들이 오는 걸 보았고, 갈 녀석들이 가는 걸 지금 보고 있다는 식으로. 묘(妙)한 고양이(猫)였다. 내 너를 잊지 않으마! 


강원도 양구에 들어서자 등굣길에 오른 학생들 버스정류장 앞에서 종종거리고, 갈 길 바쁜 차량들 쌩쌩 달려와 꽁무니에 바싹 달라붙곤 했다. 육중한 덩치의 대형트럭들 빵빵 뒤에서 컬렉션을 울려대기도 하고, 출근길이 급한 차량들 깜박깜박 길을 재촉하기도 했다. 시속 60Km가 규정속도인 도로였지만 시속60km를 유지하며 달리는 차량은 내 늙은 로시난테 밖에 없었다. 그래, 다들 바쁘니까. 왕복 2차선이고, 추월차선이 있지도 않고, 비켜설 갓길이 따로 있지도 않으니까. 나는 뒤 차량이 재촉하는 데로 가속페달을 밟다가 비켜설 약간의 공간이라도 있으면 비켜서곤 했다. 끼익 


- 왜? 무슨 일이냐?
- 아, 그냥...뒤에 붙은 차량이 바쁜가 봐요.
 

나는 이제 전통한옥을 짓는 목수이자, 산악인이 된 L이 회사에 사직서를 쓰기 얼마 전에 겪었다던 한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꼭 그 한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퇴사를 결정하는 데 밀알이 되었던. 월요일 아침 L은 여느 날처럼 출근 버스를 탔다. 여느 날처럼 샐러리맨과 샐러리우먼과 학생들과 아주머니, 아저씨들로 가득한 차 안이었다. 버스는 40분 후 회사 앞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는 사람들을 밀치고 나가 버스에서 내리려고 했으나, 문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 한 분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아주머니를 향해 짜증과 역정이 뒤섞인 말을 내뱉으며 아주머니를 '확' 밀치고 버스에서 내렸고, 헐레벌떡 달려가 간신히 출근카드를 찍을 수 있었다. 그 때, 

-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자기모멸감이 양심을 찔렀다. 5분쯤 늦고, 10분쯤 늦으면 어떻다고,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내가 어머니보다 연세가 많으신 그 분에게 그렇게 화를 내고 짜증을 냈단 말인가, 대체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무슨 생각으로, 무슨 짓을 하며 살고 있는 건가? 

기계문명으로부터 버려진 舊46번 국도

양구 방향에서 내려오던 31번 국도는 46번 국도를 만났고, 물가에 접하는가 싶더니 사명산(1,198m) 아래를 관통하는 웅진터널로 이어졌다. 그리고 웅진터널을 지나자마자 곧 바로 연결되는 수인터널. 웅진터널과 수인터널 사이 500미터. 오른쪽으로 난 샛길에서 로드 페르몬이 훅하고 끼쳤다. 나는 직감적으로 핸들을 꺾어버렸다. 그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네비게이션이 길을 벗어났다는 신호를 띄워 보냈다. 나는 커브를 주욱 그으며 내려가다 되돌아나가는 길을 그냥 지나쳤다. 다시 네비게이션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름도 떠오르지 있는 않는 왕복 2차선 도로가 좌우로 펼쳐져 있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이상야릇한 길이었다. 호수를 끼고 달리는 길은 아름답기 그지 없는데, 지나는 차량이 전혀 없는 것이다. 

2006년 추곡~수인, 수인~웅진 간 터널이 공식적으로 개통되면서 新46번 국도가 네비게이션에 등록되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GPS가 알려주는 데로 길을 오가는 사이 舊46번 국도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길이 되었다. 게다가 舊46번 국도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터널 속으로 5킬로미터 남짓 통과할 수 있는 직선거리를 S자 곡선을 그으며 에둘러 20킬로미터를 갈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더 빨리'출근하고, '보다 더 빨리'일하고, '보다 더 빨리'살아가야 하니까. Citius! Citius! Citius! 

길이 잊혀지면서 그 길 위의 관광안내소도 잊혀졌다. <양구군관광안내소>앞 넓디 넓은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붉은 벽돌로 외장을 한 건물은 대형음식점까지 2층에 이고 번듯하게 서 있었지만, 인적 없는 건물의 3분의 1은 이미 담쟁이와 수풀로 뒤덮인 상태였다. 오고 가는 손님이 없으니, 사고 팔 물건도 없고, 안내하고 안내 받을 사람도 없다. 콘크리트와 벽돌과 간판으로 이루어진 인공구조물은 있는데 인류는 통째로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이건 마치 데니 보일의 [28일 후]의 세계로 뚝 떨어진 기분이잖아. 여기 아무도 없어요? Hello, Is anybody there?... 

기계문명으로부터 버려진 길은 굽이를 지날 때마다 낯선 풍경을 아흔 아홉 첩 병풍마냥 펼쳐놓았다. 호수는 고요했고, 길가의 담쟁이들은 전봇대를 타고 올라가고, 철제 가로대는 이미 풀들로 뒤덮여있었다. 왕복 2차선 도로만이 하얗게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을 뿐, 내버려두자 자연은 스스로 자연을 회복하고 있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최악이고, 자연을 보호하는 것은 차선이며, 자연을 내버려두는 것이야말로 최선이다, 누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인간으로부터 잊혀진 탓에 스스로 치유기간을 갖고 있는 자연을 지나며 우리는 멈춰 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고, 길 한복판에 드러누워 해바라기를 하기도 했고, 드러누워 책을 읽기도 했다. 차도 한가운데에 엎드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다는 건 정말 최상의 행복이었다. 



-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부르고 있는지도,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 거예요. 두목, 언제나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을 안을 수 있을까요? 두목,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이 읽은 책에는 뭐라고 씌어져 있습디까?
 

책장을 덮고, 다시 차에 올라 화폭을 넘기며 길을 가노라니 왼쪽으로 너른 마당이 있는 간이휴게소가 나왔다. 간판은 돈까스용 포크와 나이프 그림이 음식점 로고인양 박혀 있고, '추곡광'에 이은 글씨는 지읒과 이응이 반만 보일 정도로 남아있고, 나머지 부분은 떨어져 나가 있었다. 광으로 시작되는 단어로 ‘광장’ 말고는 이렇다 하게 떠올릴 단어가 없는 나로서는 지읒과 이응이 장字에서 떨어져 나온 자음들이라고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추곡광장휴게소. 

휴게소 음식점 유리창에 지워지지 않은 글씨들을 살펴보니 한때는 감자가루수제비, 제육복음, 된장찌개, 심지어 양념숯불구이까지 팔던 곳이었던 모양인데, 이제는 주인도 객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L형과 나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싱크대 위엔 버려두고 간 식기와 주방기구들이, 작은 방 한 칸에는 오래된 이불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이미 길도, 길 위의 휴게소도 깡그리 잊은 듯 했다. 달팽이관처럼 생긴 철제 회전계단을 밟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터널에서 빠져 나오는 新46번 국도가 내려다 보였다. 

나는 느리게 가고 싶으면 느리게, 빨리 가고 싶으면 빠르게 마음이 시키는 대로 흘러가던 그 길 위에서 도시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정체된 88올림픽대로, 강변북로, 내부순환로, 외곽순환도로……출근길에 이리 치이고, 저리 밀리고, 앞차는 가지 않고, 뒤차는 빵빵대는 길에서 매일매일을 시달리는 사람들, ‘터널에서 터널로 오가는 삶’에서 빠져 나와 여기서 하루쯤 쉬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 땅에서 걷고, 달리고, 사는 모든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었다

아흔 아홉 첩 소양강 진경산수화를 감상하는 동안 차 한대 보지 못했구나. 내리막이 시작되며 新46번 국도와 만나는 출구 앞에 <추곡약수터> 이정표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 엔딩이로구나! 그때, 차량 한대가 좌회전을 하며 舊46번 국도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도대체 이 시간에 우리 말고 또 누가? 빈 택시였다. 운전기사는 차창 밖으로 날개 마냥 팔꿈치를 내밀고 있었고, 느릿느릿 슬로우 화면처럼 다가와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택시 앞 유리창으로 보이는 두 글자를 읽었는데 그러고 나자 마치 누군가가 만든 필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단편영화의 제목인 양, 두 글자는 이렇게 씌어있었다.   
휴 무(쉴 休, 힘쓸 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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