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크랩/생태환경

DMZ 보고서 [제2부-사람] ② 자력갱생, 그 잔인한 40년

by 내오랜꿈 2007. 9. 22.
728x90
반응형


[제2부-사람] ② 자력갱생, 그 잔인한 40년 

피 흘린 땅에 땀 흘리다


‘철원의 민통선 마을’과 다른 시골 마을을 구분짓는 가장 큰 시각적 차이는 마을 들머리에 있는 거대한 석조 구조물이다. 기념비들은 장엄한 영탄구를 동원해 주민들이 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지난 세월의 상처를 노래하고 있다. 

“이곳을 찾은 모든 이여!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목숨 걸고 개척한 자랑스런 마현2리의 역사를 전합니다.” 




민통선 대마리 사람들의 삶… 정부 믿고 지뢰밭에서 땅 개간했더니 원주인이 뺏어가 

▣ 출처 : <한겨레21> 제678호 2007/09/20 
▣ 대마리(철원)=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이른 가을. 마을 들머리 정자 앞에 모인 노인들이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와 그런 걸 캐물어 어쩌겠다는 것이여.” 노인들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자리를 돌려 앉았다. 낮선 이들과 말을 섞으려 하지 않는 노인들의 등은 완고하고 가팔라 보였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 안절부절못하는 취재진이 보기 민망했던지 노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노인의 이름은 박자, 상자, 석자로, 올해 일흔여섯이라고 했다. 철원이 고향으로 대마리에 정착한 것은 1967년 3월이다. 그는 “어릴 때 시절이 어려워 학교 문턱을 넘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곳으로 오면 땅을 6천 평씩 준다기에 한평생 농사나 지으려 했지. 이제 그것도 다 지난 일이구만.” 
마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68년이지만, 마을의 탄생 배경을 이해하려면 역사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50년 6월25일 시작된 3년간의 피 말리는 전쟁 끝에 유엔군은 개성을 내준 대신 중부 철원과 동부 고성을 잇는 산악지대를 손에 넣게 됐다. 미군은 비무장지대 아래 5~15km 지역에 민간인들이 낮 시간 동안 들어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귀농선’(歸農線)을 설정했고, 이후 이 지역의 이름은 ‘민간인통제선’(민통선)으로 바뀌게 된다. 한국군이 민통선 북방 지역의 통제권을 이양받게 된 것은 1964년 5월15일에 이르러서다. 

일주일치 식량과 가천막 네 개뿐 

“그래서 김희덕 장군이 꾀를 낸 거야.” 누그러진 표정의 박 노인이 입맛을 다시며 사연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김희덕 장군은 6군단장으로 새로 자신의 관할 아래 들어온 지역을 순찰하던 중이었다. 그가 떠올린 아이디어는 빈 땅에 사람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면 ‘식량 증산’도 할 수 있고, 갑작스런 ‘북괴’의 도발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의 아이디어를 채택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정부는 민통선 북방 지역에 계획적으로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해 1978년에는 그 수가 파주 백연리 등 통일촌 2개, 철원 대마리 등 전략촌 9개를 포함한 11개로 늘어난다. 그 무렵 전략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1057가구에 5667명이었다(표 참조). 



박 노인의 얘기를 듣던 김형군(71) 노인이 말을 거들며 나섰다. “그렇게 대마리도 탄생하게 된 거지.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왔어? 올해가 우리가 이주한 지 40년째 되는 해야.” 마을 노인회장을 지낸 이규철 노인(작고)이 1987년 3월11일 ‘천막동기일동(대마리)’이라는 제목 아래 기술한 A4용지 8장짜리 마을 연혁을 보면, “김희덕 장군께서 시찰 중 국가 식량 증산의 욕심(을) 갖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진언한바 (중략) 전투 능력 왕성한 자 150명으로 조를 편성해 1967년 3월29일자 현 태양교 부근에 하차(했다)”고 쓰여 있다. 

김 노인은 “그때 마을로 들어온 사람들은 철원에서 83명, 연천에서 67명을 합친 150명이었다”고 말했다. 한 조에 10명씩 모두 15개로 조를 짰다. 입주민들은 반공정신이 투철한 제대 장병 가운데 골라 뽑았다. 김 노인의 고향은 지금은 ‘김일성 고지’라는 별명이 붙은 철원군 북면 구암산 밑으로, 전쟁이 터진 뒤 지금의 서울 천호동 근처로 피난 갔다가 철원이 수복될 때 포천으로 이사했다. 박 노인은 6조, 김 노인과 그 옆에 앉은 심의호(76) 노인은 15조였다. 결혼을 했고 처자식을 먹여살려야 했지만, 마땅히 할 일이 없던 30대 초반의 젊음들이었다. 

이 150명에게 주어진 것은 일주일치 식량과 가천막 네 개뿐이었다. “가천막을 4채 세우고, 반 판 우(위)에다 버드나무 갈고(깔고) 그날 밤 전투정신으로 무장, 명일을 맞어슴니다(맞았습니다).”(이규철 회고록) 3일 동안 육군 26사단 1개 대대 곽아무개 중령의 지휘 아래 전투대비, 지형숙달 따위의 군사훈련을 받은 뒤, 버드나무와 아카시아로 가득한 들판을 옥토로 바꾸는 고된 노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1년 동안 목숨을 건 삽질 끝에 사람들은 집과 논과 학교 터를 닦았고, 이듬해인 1968년 8월30일 흩어져 살고 있던 가족들을 불러 모아 입주식을 열 수 있었다. 입주식은 해마다 8월30일에 되풀이되고 있다. 9월5일, <한겨레21>이 찾은 마을에는 ‘마을 입주식 40주년을 축하한다’는 펼침막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 노인들의 피땀 위에서 마을은 남았다. 2007년 현재 대마 1,2리를 합친 인구는 820명이다. 마을에는 한 시간에 한 대씩 버스가 들어온다.



“사고 나도 책임 안 묻는다”는 각서 

그때는 노인들도 어렸고, 농사에 대한 똑 부러진 경험도 없었다. 김 노인은 “농사에 익숙지 않아 시행착오가 많았다”고 말했다. 처음 몇 해에는 기대만큼 소출이 많지 않아 집집마다 조금씩 빚이 쌓였다. 철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소설가 임동헌이 <민통선 사람들>에서 썼듯 군 부대 통제를 받는 탓에 출입도 자유롭지 않았고, 밤마다 “뛰면 5분, 걸으면 10분. 어서 와 수령님의 품에 안기라”는 ‘북괴’의 대남방송도 지긋지긋했다.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려면 하얀 윗옷에 노란색 아니면 빨간색 모자를 써야 했고(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색깔이 바뀌었다), 등화관제가 있을 때는 불을 끄고 담요로 창문을 가려야 했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태어나자 빚은 더 크게 늘었다. 

그것뿐이었으면 노인들의 대마리 생활도 견딜 만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뜻하지 않은 사고가 터지기 시작했다. 지뢰 때문이었다. 

첫 사고는 1967년 4월10일에 터졌다. ‘2조’에 속해 있던 유철훈씨가 학교 터를 개간하다 K-14 대인지뢰에 오른쪽 무릎이 잘렸다. 심 노인은 “사람이 죽고, 다리가 잘려도 어디 가서 제대로 하소연 한 번 못했다”고 말했다.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하는 행동이라 보기엔 치졸하기 이를 데 없지만, 군인들이 여러 번 몰려와 “사고가 나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갔기 때문이다. 다친 사람들은 일을 할 수 없어 논두렁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2005년까지 지뢰를 밟아 죽은 사람이 대마리에서만 10명, 다친 사람은 13명에 이른다. 그 1세대 150명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45명, 그중에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이제 38명밖에 없다. 

전쟁 같은 개척을 통해 땅은 옥토로 변해갔지만, 소출은 오로지 노인들의 것이 되지 못했다. 사라졌던 땅 주인이 돌아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정부 시책에 의해 입주했고, 황무지를 옥답으로 개간했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호소가 등기 서류를 이길 순 없는 법이다. 노인들은 법정 투쟁을 벌였지만 번번이 패소했다. 

△ 매년 8월30일에 대마리 묘장초등학교에서 입주 기념식이 열린다. 슬레이트로 만들어진 70년대 학교 지붕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란 구호가 적혀 있다.



사람들을 지뢰밭으로 몰아넣어 땅을 개척하게 만든 정부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겨레21>은 국가기록원을 통해 당시 정부의 고민을 보여주는 몇 가지 문서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1978년 5월26일 행정조정실장이 국방부 장관과 지방재정국장에게 보낸 공문 ‘민통선 북방 지역의 영농 및 주거상의 문제점 검토’(문서번호 국행이 100-147)를 보면, 정부가 민통선 내 토지를 놓고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74년 9월이었다. 청와대 사정담당특별보좌관이 민통선 지역 지주들과 개척민들 사이에 벌어진 토지 분쟁의 전말을 담은 ‘전방지역 토지방쟁 정리방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박 대통령에게 제출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문서 속에는 땅을 둘러싼 땅 주인과 대마리 주민들의 갈등 양상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땅의 원소유자 지윤전씨가 1976년 2월 “함부로 농사를 짓고 있는 땅 9천 평을 돌려달라”고 주민들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결과는 땅 주인의 승소였다. 지씨는 이를 알리기 위해 자신의 땅 위에다 경고판을 설치했지만, 흥분한 주민들은 이를 부서뜨리고 만다. 

정부의 방침 “너희끼리 알아서 하라”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주먹구구 행정이었다는 비난이 가능하겠지만, 정부는 이같은 토지 분쟁이 터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민통선 북방 유휴지 개발’ ‘지역 안보’ ‘대북괴 심리전 효과 증진’이라는 정책 목표를 앞세운 탓에 그 지역에 땅 주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황한 정부는 부랴부랴 ‘민통선 북방토지 분쟁해결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어 문제를 풀려고 해보지만, 곧바로 제동이 걸린다. “사인 간의 소유권 분쟁에 섣불리 나서지 말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 노인은 “땅을 개척하면 1인당 6천 평씩 주겠다는 약속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잊혀져갔다”고 말했다. 자료 안에 첨부된 ‘사정협의회 제안 자료’를 보면, 정부가 정한 입장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드러난다. “정부 시책에 의하여 설립된 전략촌이기는 하나 토지 소유자와 경작자 간의 분쟁은 근본적으로 사인 간의 사법상 문제이고, 법정 사태까지 발전하는 단계에 있어 행정기관이 분쟁 당사자들에게 합의를 강요하고, 이를 강제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 아니하다.” 쉬운 말로 바꾸자면,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니, 너희끼리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김정배(42) 대마2리 이장은 “결국 주민들은 돈을 주고 땅을 사거나, 소작료를 내는 소작인으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어르신들이 젊을 때 피땀을 흘려 일군 땅이지만, 제 땅을 가지 사람은 전체의 40% 정도밖에 안 됩니다.” 

△ 마을을 개척한 1세대 노인들이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김정배 대마2리 이장은 “언제 사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노인들의 희생 위에서, 그래도 마을은 남았다. 열심히 일해 땅을 사 모은 사람들은 이제 ‘철원 오대쌀’을 생산하는 부농이 됐다. 2001년에는 강원도 새농어촌건설운동 최우수마을로 뽑혔고, 가구당 농사 면적이 큰 덕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산다. 1968년 개교한 묘장초등학교는 올 2월 39번째 졸업생을 배출했다. 초등학교가 키워낸 아이들은 모두 719명이다. 

박 노인은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노인 중 일부는 땅을 잃은 채 마을을 떠났고, 일부는 소작인으로 남았다. 그나마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불어닥친 외지인들의 땅 투기로 철원 땅 값이 몇 배로 올라 이젠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다. 마을의 리훈(里訓)은 ‘자력갱생’이다. 노인들이 ‘자력갱생’하는 동안 국가는 멀었고, 총검을 든 군인과 지뢰와 백마고지 너머 ‘북괴’의 대남 방송은 가까웠다. 

 

체제 경쟁을 위한 경연장

 

민통선 마을은 언제부터 왜 만들어지기 시작했나 

‘민통선 마을’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민간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선 안에 들어선 민간인 마을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민통선 안의 가장 첫 마을은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 ‘대성동 마을’이다. 

대성동은 한국 정부가 인공적으로 조성한 마을이 아닌 애초부터 존재했던 자연 부락이다. 마을이 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절묘한 위치 때문이다. 대성동은 판문점 남쪽 지역의 비무장지대에, 북한의 기정동은 그 북쪽 비무장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남과 북의 불필요한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완충장치 구실을 해왔다. 대성동은 비무장지대에 자리한 탓에 유엔사의 관할 아래 있으며, 지금도 한국 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한다. 

맹렬한 체제 경쟁을 벌이던 시절 두 마을은 남북한의 체제 경쟁을 위한 경연장이 되고 만다. <한겨레21>이 국가기록원에서 찾은 ‘비무장지대 거주민간인 원호에 관한 건’(1958)을 보면,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한국 정부의 초조함이 날것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동부락 전면 약 2km 지점인 괴뢰 측 비무장지대에서는 1939명의 북한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어 적극적인 제반 원호를 실시하고 있지만 (중략) 대성동 부락에 거주하는 아방 측 민간인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하등의 원호대책이 강구되어 있지 않아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서 긍지를 상실케 될 우려가 있다고 사료됨.” 대성동의 태극기 깃대는 100m고, 기정동의 인공기 깃대는 160m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본격적인 민통선 마을 개척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부터다. 한국 정부는 1968년부터 ‘민통선 북방 유휴지 개발’과 ‘대북괴 심리전 효과 증진’을 위해 제대 장병을 중심으로 한 영세민들을 민통선 마을에 집단 이주시켰다. 서쪽의 파주 백연리에서 시작해 양구 만대리에 이르는 긴 지역에 1978년까지 11개 마을 5667명이 이주해왔고, 1980년 관전리에 32세대가 추가 입주했다. 그 밖에 고성군 명파리처럼 민통선 북방 지역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자립안정촌’도 90여 개에 이른다. 

가장 최근에 조성된 ‘민통선 마을’은 2001년 11월, 임진강 이북 장단군 진동면 실향민들이 파주시청의 도움을 받아 만든 해마루촌이다. 마을은 더 이상 체제 선전을 위한 선전물이 아니다.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생태와 안보 관광을 겸한 관광객이다. 대안학교가 주최하는 생태학교도 이따금 열린다. 

 

 

“국유화한 땅 싸게 팔라” 

이석균 양구군 해안면 국유농지매각관련 추진위원장 

△ 이석균 추진위원장

땅 주인과 개척민 사이의 토지 분쟁은 반도의 서쪽 끝 파주에서 동쪽 끝 고성까지 펼쳐진 민통선 마을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고민거리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의 사정도 비슷하다. 이석균 해안면 국유농지매각관련 추진위원회 위원장은 “땅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어온 개척민들을 위해 정부에서 땅을 저렴하게 불하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해안면을 둘러싼 토지 분쟁을 설명하면.

=전쟁이 끝난 뒤 버려진 이곳 땅을 개간하기 위해 육군 6사단은 1956년 강원도 홍천 등지에서 농사를 짓던 화전민 160가구 600여 명을 이곳 해안면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4년 뒤, 3군단 민사참모 고아무개 소령이 주관해 농민들에게 농지를 분배했다. 농민들은 잦은 지뢰 사고에 목숨을 잃어가며 버려진 600만 평을 옥답으로 만들었다. 

1982년 12월, 전쟁 이후 수복한 38선 이북 땅의 등기를 복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복지역 내 소유자 미복구토지의 복구등록과 보존등기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하 특조법)이 만들어져 시행됐다. 특조법은 땅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국유화한다고 못박고 있다. 이 지역 땅은 등기 서류가 사라져 누구 땅인지 확인할 수 없고, 스스로 땅 주인임을 주장하고 나선 사람도 없었다. 결국 땅 255만 평이 1996년 재경부와 농림부 명의로 국유화됐고, 남은 293만 평도 언제 국유화될지 모르는 상태다. 

요구 사항은. 

=해안면의 사정은 토지 분쟁을 겪고 있는 철원 등 다른 지역과 다르다. 원소유자가 나타나 문제가 복잡해진 철원과 달리 해안면 땅은 원소유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현행 국유재산법은 국가가 땅을 취득한 뒤 10년 안에는 불하할 수 없다고 돼 있는데, 제한 기간인 10년이 지나 이제 불하가 가능해졌다. 우리 주장은 땅을 개척민에게 싸게 팔라는 것이다. 애초 누구 땅인지 모른다는 소린데,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나. 

=수십 년 동안 마을 사람들이 같은 땅을 경작해왔다. 주민들 사이에는 이미 교통정리가 끝났다. 분란이 일어날 소지는 없다. 

정부에게 바라는 점은. 

=주민들이 고민하는 것은 두 가지 문제다. 하나는 현행 국유재산관리계획이 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의 면적을 최대 1만㎡로 제한해놨다는 점이다. 해안면 주민들이 자신이 일군 땅을 살 때는 그 기준을 좀 완화해줬으면 한다. 둘째, 땅이 지금의 가치를 갖는 것은 우리가 그 땅을 개간했기 때문이다. 땅 값에서 개간비를 빼고, 남는 돈은 주민들이 장기 분할 납부할 수 있는 길을 터줬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땅은 돈 많은 외지 사람들에게 넘어갈 수 있다. 


 

 

〈DMZ 248km 보고서〉제2부-사람

▶[제2부-사람] 이 험한 곳까지 오셨네, 땅 투기
▶[제2부-사람] ‘평화관광’ 같이 가실래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