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고지’ ‘모택동 고지’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제인러셀 고지’….
전방을 다니다 보면 처절한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살리는 이름들이 남아 있다. 바로 각양 각색의 고지 이름이다. 그 가운데는 투쟁심을 고취시키거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리는 진저리나는 이름도 있지만, 개중에는 전쟁의 시름을 잊으려는 듯 여배우의 가슴을 딴 재미 있는 것도 있다.
화채그릇을 닮았다해서 붙은 이름인 펀치볼. 을지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김일성고지(924고지)와 모택동고지(1026고지)가 보인다. 국군해병 1연대가 철옹성 같은 1026고지와 924고지를 반드시 탈취하겠다는 뜻으로 김일성과 모택동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적개심을 고취시켰다. 해안분지를 둘러싼 도솔산, 가칠봉, 대우산 등은 한국전쟁 때 대표적인 쟁탈의 요소였다.
양구(방산면)에서 또 하나의 유명한 고지는 ‘피의 능선(Bloody Ridge)’이다. 종군기자들은 피로 얼룩진 능선이라 해서 938고지를 이렇게 붙였다. 이 전투는 영화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후반부를 장식하기도 했다. 북한군(일명 깃발부대)과 국군의 격전장이었던 것이다.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고지군은 ‘단장(Heartbreak)의 능선’이라 한다.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지 종군기자들이 “심장이 찢어질 듯한 참상”이라 해서 이렇게 이름 붙였다. 유엔군 사령관을 지낸 클라크 대장의 외아들이 이 고지전에서 중상을 입고 후송됐다.
양구는 아니지만 오성산과 김화 사이 험한 산비탈과 깊은 골짜기를 두고 격전을 벌인 곳을 저격능선(Sniper Ridge)이라 했다. 적진과의 거리가 가까워 저격 당하기 십상이었다 한다. 오성산(1062고지)은 김일성이 “육사 군번 세 도라꾸와도 바꾸지 않는다”고 할 만큼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저격능선 서쪽에 있는 두 개의 봉우리는 ‘제인러셀고지’라 했다. 미국의 육체파 여배우 제인 러셀의 가슴을 연상시킨다 해서 미군들이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이 제인러셀 고지는 북한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더듬어왔듯 비무장지대 일원에는 수많은 과거의 유산들이 남아 있다. 이런 문화유산들에 대한 보전대책을 세우는 것은 물론 시급한 과제이다. 하지만 그런 과거의 문화유산과 함께 아픈 현대사의 상징인 전쟁·분단 유적들도 보전해야 할 시점에 왔다. 다시는 이런 전쟁과 분단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측면에서도….
〈이우형|현강문화연구소장〉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28) 양구 펀치볼 | 출처:인터넷경향신문 / 입력: 2007년 09월 14일 14:46:43 | -수천년 터전… 무릉도원의 꿈… 그러나 갈등의 땅-
| | 최전방 을지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양구 펀치볼(해안분지). 잔뜩 찌푸린 구름마저 펀치볼을 피했다. 구름 사이로 화사한 햇빛이 신묘한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양구 해안면/박재찬기자> |
“야. 정말 대단하네.”
그야말로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사가 터졌다. 하늘을 뒤덮었던 짙은 구름 사이로 환한 햇빛이 펀치볼(해안분지)을 비추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왜 구름은 저토록 초록의 분지만을 피했을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 아니면 환한 조명 아래 야간경기를 벌이는 축구장을 관중석 맨 꼭대기에서 바라본 느낌이랄까.
우여곡절 끝에 해안(亥安)에 들어온 선사인들도 이곳(을지전망대)에 올랐겠지. 신이 내린 듯한 저 찬란한 땅을 바라보고 경외감을 느꼈겠지. 그리곤 마음의 본향으로 삼았겠지. 해안분지, 즉 펀치볼은 그야말로 자연현상이 빚은 경이로운 땅이다. 해발 1000m 고봉준령이 병풍처럼 둘러쌌다. 서쪽은 가칠봉(1242m)·대우산(1179m)·도솔산(1148m)·대암산(1304m) 준령이 막았다. 동쪽엔 달산령(807.4m)·먼멧재(730m)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북쪽엔 휴전선 너머 저편에 보이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 자연현상의 조화
분지의 남북 방향은 11.95㎞, 동서 길이는 6.6㎞이다. 분지의 단면은 U자형인데, 맨 밑바닥의 고도가 400~500m이니, 주변 산지보다 400~800m 낮은 셈이다. 대체 무슨 조화인가. 왜 이 첩첩산중에 이런 엄청난 분지가 생겼을까. 어떤 이들은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 지금과 같은 거대한 분지가 조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즘엔 이른바 ‘차별침식’이라는 전문용어로 설명하는 게 대세다. 즉, 분지 중심부는 중생대 쥐라기(1억8000년~1억3500년 전)에 지각을 뚫고 올라온 화강암이다. 분지 바깥쪽은 선캠브리아기(5억4000만년 전까지)의 변성퇴적암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분지 중심부의 화강암은 고온습윤한 기후 때문에 주변 산지의 변성퇴적암보다 훨씬 빠르게 침식됐다. 원래 지표 깊숙한 곳에서 만들어지는 화강암은 일단 지표상에 노출되면 심한 풍화작용을 일으킨다.
그러니까 중심부의 화강암은 빗물과 바람 같은 환경에 쉽게 깎여 주변의 퇴적암 지대보다 낮은 지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해안분지,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이곳, 천혜의 터전에서 구석기·신석기·청동기·초기 철기인들이 살았던 것이다.
무릉도원 주민들이 했다는 말이 이랬던가. “우리 조상들은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이곳에 온 이후 한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밖은) 어떤 세상입니까?”(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북한강 계곡, 심산유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온 선사인들 앞에 별안간 나타난 확 트인 세상. 그들은 이곳에 짐을 풀고 터전을 잡고 부족을 이루면서 오순도순 살았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도 골백번 바뀌었을 지금. 하지만 해안분지로 가는 길은 유비쿼터스 사회에 접어들었다는 지금도 만만치는 않은 것 같다.
# 무릉도원의 꿈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군대얘기’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이야기. 일행은 바로 그 인제·원통을 거쳐 해안분지로 들어갔다. 민간인은 드물었고, 최전방 군인들의 모습만이 눈에 띄는 여정. 간간이 마주치는 헌헌장부 사병들의 군기 바짝 든 새까만 모습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기자가 가는 이 길은 선사인들이 그들만의 ‘무릉도원’을 찾아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해안분지의 서쪽 높은 산지에서 발원한 물은 비교적 낮은 동쪽의 당물골로 합류하는데, 합류한 물은 해안분지를 빠져나와 인제 방면으로 흐른다. 그러나 이 길은 20세기 들어 무릉도원이 아닌, 분단·냉전의 한많은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되었다. 1956년 4월25일. 수천년 전 선사인들이 둥지를 틀었던 그 ‘별천지’에 150가구 965명의 ‘개척민’이 이주했다. 해방 이후 북한땅이었던 이 해안분지는 한국전쟁 후 ‘수복’되었다. 1954년 유엔군 사령부는 이른바 ‘수복지구’의 행정권을 한국정부에 넘겼다. 정부는 북한의 선전촌에 대응하고, 국토의 효과적인 이용을 위해 민북지역에 대한 정책이주를 추진했다. 바로 해안면에 도착한 개척민들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닿은 해안면은 면 전체가 민통선 이북지역에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이 특수한 곳에 온 사람들 역시 그 옛날 선사인들처럼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리곤 ‘피와 땀으로 얼룩진 괭이와 호미’로 불발탄과 지뢰가 지천에 깔린 땅을 일구었을 것이다.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 해안분지엔 510가구 1426명이 살고 있다. 주로 감자, 무, 배추 등 고랭지 농사를 주업으로 삼고 있다. 해방 이전에 살았던 원주민의 수는 5% 선이며, 주민 가운데 70%가 정책이주해 왔던 사람들이다. 휴전선 바로 밑 마을엔 200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주민들의 농사를 돕고 있다는 것도 이채로운 풍경이다. 이들 역시 이역만리 먼 곳에서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이곳을 찾았을 테지.
# 분쟁의 땅으로?
21세기에 접어든 이때 이곳에 사는 주민들도 수천년 전 선사인들이 그랬듯 유토피아의 꿈을 일궜을까. 물론 주민들의 삶은 다른 지역 농가보다는 넉넉하다. 주민 이호균씨(해안면 오유2리)는 “다른 지역보다는 1.5배 정도 소득이 높은 편”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해안분지에 들어온 사람들이 그린 ‘삶의 궤적’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함광복 GTB DMZ연구소장은 “현대사의 흐름에서 보면 해안분지는 전쟁·분쟁의 땅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때는 한 뙈기의 땅이라도 빼앗기 위해 남북간에 처절한 전투를 벌였잖아요. 그리고 그후에는 정책이주민과 토지 원소유주 간 치열한 토지분쟁이 펼쳐지기도 했죠. 지금도 다툼은 끝나지 않았어요. 정부를 상대로 국유지를 불하받기 위한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지요.”
특히 1980년대 일어난 해안면 토지분쟁은 민북지역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례였다고 한다. 1956년 정책이주 때의 정부방침은 “주인 없는 땅을 마음껏 개간해서 먹고 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을 피해 떠났던 땅주인들이 돌아오자 토지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대법원은 결국 토지 원소유주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는 ‘좋은 세상’을 바라면서 피땀을 흘린 개척자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책이주자들이 일군 땅(1980만㎡)이 속속 국유화되기 시작했다. 개척자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정부는 국유화한 땅을 다시 경작자에게 불하하겠다는 방침이지만 1만㎡ 이상은 불허한다는 방침이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1만㎡(3000평)는 너무 작은 땅. 그러니 정부를 상대로 또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꿈꾸는 무릉도원을 만들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하기야 이곳에 둥지를 튼 선사인들도 맨손으로 이 땅을 개척했을 터. 노동, 갈등, 타협과 같은 지난한 과정 끝에 수 천 년의 터전을 꾸몄을 것이다.
〈이기환 선임기자|양구 펀치볼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