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꿈 혹은 비표상적 사유를 향한 모험
서동욱, 『차이와 타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별 어려움 없이’ 얘기하는 사상가에 속한다. 예컨대 『니체와 철학』『프루스트와 기호들』『스피노자의 철학』『앙띠 오이디푸스』『칸트의 비판철학』『베르그송주의』『의미의 논리』『매저키즘』『철학이란 무엇인가』『감각의 논리』『영화I』『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카프카론』『푸코』『대담』『천개의 고원』 등 들뢰즈/가타리 저작이 상당 부분 번역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그 관심도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이 정도라면, 내가 아는 한, 최근 들어 이렇게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사상가를 찾아보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한다면 ‘21세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푸코의 말이 적어도 21세기 문턱에 들어선 한국에서는 현실화된 것으로 보아 큰 잘못이 아닐 터이다.
그렇다면 왜 들뢰즈인가, 왜 들뢰즈가 이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른 것인가? ‘들뢰즈 현상’ 또한 말 그대로 한바탕 신드롬 또는 붐으로 끝나고 말 것인가, 아니면 한국 인문학의 사유를 더욱 풍성하게 할 자양분으로 자리잡을 것인가?
한 사상가의 전모를 그려볼 수 있으려면 그가 구사하는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전문적인 연구자가 아니라면, 그 사상가의 저술과 입문서를 나란히 놓고 읽어가는 게 상례이다. 들뢰즈 또한 마찬가지여서 그가 아무리 매력적이라 하더라도 그가 구사하는 용어나 개념들에 대한 검토 없이 그의 생각을 되새기다가는 낭패를 보기 일쑤이다(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러했다).
‘현대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이라는 부제가 붙은 서동욱의 『차이와 타자』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은 더욱 절실해진다. 물론 서동욱 이전에도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의 철학 사상』이나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가타리』와 같은 ‘괜찮은’ 입문서가 있었다. 그리고 이정우의 일련의 강의 노트, 즉 『시뮬라크르의 시대』『삶·죽음·운명』『접힘과 펼쳐짐』 등도 들뢰즈 사상의 뿌리와 맹아 그리고 줄기를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이정우의 책들은 들뢰즈를 매개항으로 하여 동양과 서양의 철학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에 관해 적지 않은 힌트를 제공한다.
그런데 『차이와 타자』가 지닌 강점은 무엇보다 들뢰즈의 사상을 구성하는 개념을 면밀하게 그리고 ‘어렵지 않게’ 풀어낸다는 데 있다. ‘어렵지 않다’는 데 주목하기 바란다! 많은 소개서나 입문서들이 ‘원저보다 더 어려운’ 예를 심심찮게 보아온 터인지라 이 책을 잡고서도 반신반의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의심은 참으로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개념들에 대한 꼼꼼한 해설과 각주(각주가 저자의 성실성을 드러내는 소중한 글쓰기 공간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들뢰즈 사유의 방법론에 대한 탐색과 그의 전후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다른 사상가 – 플라톤, 칸트, 니체, 라이프니츠, 프루스트, 프로이트, 사르트르, 레비나스, 바르트 – 들과의 관련성 파악 등은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배가한다. 그 내적 연관성을 따져가면서 읽노라면 『차이와 타자』는 어느새 한 편의 드라마 또는 조각맞추기 퍼즐처럼 여겨진다. 하기야 사상사란 시공간을 넘나들며 물고 물리는, 쫓고 쫓기는, 내부로 파고들어 전복을 꿈꾸는, 그리하여 기존의 사유 패턴에 상처를 입히고 자신마저도 상처를 입는, 그런 드라마가 아닐까.
다시, 앞에서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왜 들뢰즈인가? 들뢰즈 철학의 핵심은 주체성에 대한 비판, 고쳐 말해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주체성의 확립에 근거를 둔 표상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다. 근대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에 있어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주체성의 원리를 내파함으로써 역사적 체제로서의 근대가 초래한 비인간화 논리를 공략하기 위한 기획, 이것이 들뢰즈 사상을 가로지르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주체성이 부재하는 카오스’를 꿈꾸는 것, 주체를 일의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또는 ‘미리 전제된 자아’를 설정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무차별적으로 억압해 온 사유의 근거를 폭파하는 것, 그리하여 차이를 인정하고 타자를 통해 또 다른 ‘수많은 나’를 발견하는 일, 이를 두고 나는 들뢰즈의 꿈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서동욱은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사유하는 것은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하는 것, 발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유란 ‘창조’이다. 인식은 창조이다”라고.
따라서 미리 주어진 무엇 또는 독단적이고 임의적인 공리(억압)들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법칙과 가치는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지속적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와 들뢰즈가 사용하는 문화란 언제나 ‘생성’ 가운데 있는 동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들뢰즈를 읽어야 한다. 『차이와 타자』는 그런 들뢰즈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데 친절하고도 진지한 안내자 역할을 할 것이다.
정선태 「들뢰즈의 꿈 혹은 비표상적 사유를 향한 모험」, 『BOOK+ING 책과 만나다』, 그린비(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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