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니세프스키, 『무엇을 할 것인가』
‘혁명이 성공하고 실연을 당하면 행복할까? 불행할까?’ 80년대를 통과하면서 반쯤은 장난으로 던져보았던 질문이다. 혁명이 사랑을 흡수해버렸던 80년대나 사랑의 위세 앞에 혁명이 실종된 지금 이 시대나 ‘사랑과 혁명의 함수관계’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신파조로 말해, 혁명을 꿈꾸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혁명이 망각되는, 이 이분법적 회로를 벗어나는 길은 없는 것일까?
체르니세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 물음에 대한 아름다운 보고서다. 진정 놀라운 것은 이 소설이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그것도 유형지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이념투쟁이 거센 시절, 혁명을 꿈꾸다 갇힌 수인의 몸으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사랑이야기를 쓸 수 있다니. 그는 사랑의 습속을 바꾸는 일, 그것이야말로 혁명이라고, 아니, 사랑의 습속을 바꾸지 못하는 혁명은 결국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과연 그가 그려내는 사랑은 ‘전복적’이다. 숙명적 엇갈림, 배신과 복수, 권태 아니면 변태로 점철되는 그런 류의 사랑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관계 안에서 사랑이 어떻게 눈부신 생의 환희를 분출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또 다른 ‘인연의 장’을 증식시켜 가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주인공 베라와 그의 연인들은 슬픔과 연민을 통해서만 표현되는 사랑, 늘 무언가를 하지 못하도록 붙들어매는 그런 수동적 사랑을 거부한다. 그들에게 있어 사랑이란 스피노자 식으로 말해 ‘기쁨의 능동적 촉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능동적 에너지가 외부로 흘러 넘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베라가 운영하는 ‘코뮨’은 말하자면 그 사랑이 일으킨 분자적 공명의 장인 것이다.
그래서 베라가 남편 로뿌호프의 분신과도 같은 친구 끼르사노프와 두번째 사랑에 빠졌을 때, 그것은 멜로적 삼각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벽을 계속 넘어서는 혁명, 아니 더 나아가 장엄한 구도의 파노라마가 된다.
뜨겁게 사랑하되 결코 한 순간에 머무르지 않는, 무상한 인생의 바다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유목적’ 여정으로서의 사랑, 그에 비한다면 사랑은 영원해야 한다는 망상에 시달리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강철 같은 습속의 굴레들을 기꺼이(?) 수락하는 우리 시대의 사랑은, 오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사랑과 혁명, 아니 구도가 그대로 일치하는 길이 그토록 가까이 있건만.
고미숙, 「사랑과 혁명이 난나는 길은?」『book+ing 책과 만나다』,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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