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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톨레랑스’ 낳은 차이의 긍정학 -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by 내오랜꿈 2008.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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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랑스’ 낳은 차이의 긍정학
[고전다시읽기]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 
출처 : <한겨레> 2006년 09월 15일 



[한겨레] 고전 다시읽기/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차이와 반복>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와 더불어 들뢰즈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책이다. 앞의 것이 주논문, 뒤의 것이 부논문이다. 앞의 것이 동일성의 사유 아래 억압당해온 ‘차이의 철학’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 결정적인 책이었다면, 뒤의 것은 그 동안 외면당해 온 사상가 스피노자를 본격적으로 조명하게 만든 결정적인 책이었다. 

예전에 푸코는 <차이와 반복>과 그 이듬해에 출판된 <의미의 논리>를 묶어서 ‘철학극장’이라는 제목의 서평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서평은 첫 문장에 적어놓은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같은 예언으로 인해 더 유명해진 바 있다: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 20세기가 들뢰즈만의 세기가 될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들뢰즈 없이는 생각하기 힘든 세기가 되리라는 것은 지금 들뢰즈의 이름이 유령처럼 온 세상을 떠도는 것을 보면 이미 어느 정도는 입증된 것처럼 보인다.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

들뢰즈가 이 책뿐만 아니라 이후의 책들에서 일관되게 ‘차이의 철학’을, 그리고 ‘차이의 정치학’을 하고자 했다는 것은 이젠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자유주의자들마저 ‘차이’에 대해, ‘차이의 정치학’에 대해 말하는 지금, 과연 ‘차이’를 말하는 게 무슨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로써 오히려 분명해진 건,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차이를 말하는가가 문제라는 사실이다. 

사실 철학자가 차이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같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의 짝인 이상, 차이를 말하지 않고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가 겨냥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헤겔도 동일성만큼이나 차이에 대해 말한다. 문제는 거기서 차이가 동일성에 복속되어 있고 그것에 포섭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생물학에서 지금도 사용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 개념은 가령 호랑이라는 ‘종’이 다른 종과 다른 차이에 대해 말하지만, 그 차이는 고양이과라는 동일한 ‘유’ 개념 안에서의 차이에 불과하다. 

또 하나,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란 두 상태의 정태적인 비교에서 도출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차라리 두 상태가 만나고 섞임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인 A가 인디언인 B에게 “나는 너와 달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양자를 비교해서 서로에게 없는 차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도 이런 의미의 차이는 안다. 그들은 그 차이에 앞선 것과 뒤처진 것의 자리를 할당하곤, 뒤처진 것을 앞선 것에 맞추고자 한다. 즉 차이는 부정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것이 ‘문명화’고 ‘계몽’이다. 자유주의자라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자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나도 네 인생에 참견하지 않을테니, 너도 내 일에 참견하지 말란 말이다. 이 경우 차이를 말하는 것은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동일하게 존속하겠다는 말이 된다. ‘관용(tolerance)’ 또한 여기서 멀리 나간 게 아니다. “나는 너와 다르지만, 네 차이를 존중하겠다”는 것은 그 차이를 인정하고 감수하겠다는 말일 뿐이다. 달라도, 혹은 싫어도 참고 견디는 것, 그것은 차이를 긍정하는 게 아니다. 진정 차이를 긍정하는 자라면, 자신과 다른 것과 만나서 그것을 통해 자신이 달라지겠고 생각한다. 그것이 차이를 진정 긍정하는 것이고 차이를 생성으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차이의 긍정, 혹은 생성으로서의 차이란 이런 점에서 ‘반복’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A가 B와 만나 A'이 되고, C와 만나 A''이 되었을 때, 여기서 A의 궤적 A-A'-A''-...은 A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가령 모네의 <수련> 연작은 빛과 수련이 만나 만들어진 차이들이 만날 때마다 다르게 반복되어 그려진 것이다. 빛 안에서의 차이, 혹은 빛으로 인해 야기되는 수련의 차이를 포착할 수 있는 한, 수련은 항상 다른 수련으로 반복되어 그려진다. 더 이상 차이를 만들지 못하면 그는 수련을 더 그릴 수 없게 된다. 똑같은 그림에 지나지 않는 것, 그것은 반복의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이처럼 차이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되돌아온다. 

그러나 그런 반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차이를 제거하는 반복도 있다. 가령 실험실에서 동일한 약품을 섞을 때, 온도나 양 등의 차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온도를 동일하게 하고 실험해야 한다. 차이를 만드는 조건을 제거하여 원하는 요인이 동일한 결과를 반복하게 만들지 못하면 실험은 실패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험은 차이 없는 반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동일성마저 차이로 정의 내려

따라서 반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 셈이다. 차이의 반복과 차이 없는 반복. 차이의 반복으로 인해 들뢰즈는 베르그손과 달리 반복을 긍정할 수 있었다. 베르그손에게 반복이란 습관처럼 차이 없이 되풀이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니체의 ‘영원회귀’를 “차이나는 것만이 되돌아온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들뢰즈는 이와 다른 종류의 반복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긍정한다. 이 두 가지 반복은 동일성마저 차이로 정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동일성이란 차이나며 반복되는 것에서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의 철학은 차이가 존재론적으로 일차적이고, 차이가 생성으로서 정의되는, 그리하여 차이를 긍정하는 철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차이의 철학은 차이의 철학이란 이유로 인해 근본적인 난점에 부딛친다. 차이의 철학은 차이를 일차적인 ‘원리’로 삼는 철학이다. 그러나 차이의 철학이 차이를 원리로 삼을 수 있을까? 그렇게 되는 순간 차이는 모든 것을 통합하고 통일하는 또 다른 동일자의 이름이 되지 않을까? 포기한다면 차이의 철학은 불가능한 기획이 된다. 

이를 위해 들뢰즈는 차이를 하나의 ‘이념’으로 설정한다. 그런데 이 ‘이념’이란 말은 칸트에게서 빌린 것이지만 칸트나 플라톤과 달리 어떤 이상적 모델이나 ‘근거’가 아니라 차라리 ‘문제’다. 그것은 차이를 근거 삼아 모든 것을 추론하는 원리가 아니라 모든 것에서 차이가 작동하게 하는 문제설정이다. 그것은 원리나 법칙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미분소’ dx 같은 것이다(미분differential은 차이difference라는 말에서 나왔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내용도, 규정도 없지만, dy나 dt 같은 다른 미분소와 만나 규정가능한 것이 되는 것(가령 xdx+ydy=0). 무한소에 가까운 차이조차 포착하게 하지만,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으로 다룰 수 있는 것. 힘관계가 미분방정식(‘문제’!)으로 표시된다는 것을 안다면, 이러한 ‘이념’이 ‘문제’와 결부된 것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어 동일한 방정식(문제)으로 표시된 場은 동일한 관계를 갖는 것임을 안다면, 이 기이한 이념이 동일성 또한 다룰 수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분’ 개념 적용 차이의 세분화

‘이념’과 반대쪽에 있는 것은 개별적이고 개체적인 것이다. 이념이 추상적이라면, 개체는 구체적인 것이다. 구체적인 층위에서 차이적/미분적(differential) 관계가 개체화되는 것을 다루기 위해 들뢰즈는 ‘강도(intensity)'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강도란 힘의 차이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미분적인 관계는 강도적인 양을 통해서 개체적 차이로 구체화(분화)된다. 예컨대 유전자는 뉴클레오티드들의 이웃관계(미분적 관계)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는데, 이러한 관계는 수정란 표면에 새겨지는 힘의 강도들을 통해 상이한 기관들로 분화된다. 이처럼 유기체는 차이적 관계가 작동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관계의 차이에 따라 다른 개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감성적인 것’ 또한 ‘강도’(차이)로 설명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차이라는 말에서 흔히들 상상하는 ‘사소한 것에의 함몰’과 반대로,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대에 때 아닌 거대 존재론을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차이의 개념을 통해 존재자들의 양상들을 설명하려는 그런 존재론을. 그것은 일종의 메타피직스metaphysics다. 그러나 하나의 원리에 의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전통적 의미의 ‘형이상학metaphysics’이 아니라, 자연학(physics)에 의거하여 자연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란 의미에서 ‘메타-피직스’다. 이러한 차이의 존재론은 이후 >의미의 논리>에서 의미를 다루는 ‘사건의 철학’으로 전개되고,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의 고원>에서 자본주의와 대결하는 역사-정치학으로 확장된다. 결코 쉽다고는 할 순 없지만(!)-.-;; 고생한 만큼의 ‘강도’로 새로운 사유의 무기를 벼리어낼 수 있는 창조적 세계를 발견하시길…. 

서평자 추천 도서 

<차이와 반복> 들뢰즈 지음. 김상환 옮김. 민음사 펴냄 

<싹트는 생명> 피어슨지음. 이정우 옮김. 산해 펴냄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의 철학을 생물학의 사례를 통해 해설한 책). 

<들뢰즈 맑스주의> 쏘번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펴냄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들뢰즈의 정치학을 해석한 책) 

<노마디즘 1·2> 이진경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천의 고원>에 대한 강의를 통해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소개한 일종의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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