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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 가진 것 없는 자의 전술로 ‘진지전’이 과연 적당한가

by 내오랜꿈 2008.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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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 없는 자의 전술로 ‘진지전’이 과연 적당한가
[고전다시읽기]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 
출처 : <한겨레> 2006년 07월 07일 



[한겨레] 고전 다시읽기/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마치 안 그런 것 같은 포즈를 취하는 책들이 많지만, 사실 모든 책에는 그것이 씌어진 조건과 상황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나는 책이든 뭐든 “텍스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해체주의자의 말을 믿지 않는다. 거꾸로 “모든 텍스트는 그 외부에 의해 만들어진 주름”이라고 믿는다. 정도차는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책에는 그것이 씌어진 조건이, 그 외부가 들어와 앉아 있고, 또 그것이 읽히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게 읽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두뇌 20년간 중지시키려 투옥했지만

<옥중수고>는 특히나 그 외부에 대한 이해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책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람시는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에서 공산당 지도자였다가 체포되어 결국 감옥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사망한 인물이다. “20대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못한 사람도 바보고, 40대가 되어 그것을 버리지 못한 사람도 바보다”라는, 우리도 자주 듣는 ‘명언’을 남기며 사회주의자였던 과거를 버리고 파시스트가 되었던 사람이 무솔리니였다. 반면 그런 그가 15살 소년이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어이없는 사건을 만들어 국회의원들의 면책특권마저 무시하여 체포하려고 할 때에도 “선장은 배가 난파되었을 때 자신의 배를 떠나는 최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망명을 거절하고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사한 사람이 그람시였다. 그를 기소하면서 검사는 “우리는 이 자의 두뇌가 작동하는 것을 20년 동안 중지”시키려 했지만, 1926년 체포되어 1935년 로마의 병원으로 옮겨질 때까지 그의 두뇌는 감옥 안에서도 활동을 계속 했고, 그렇게 씌어진 노트들을 러시아인이었던 처형 타티아나가 외교관 가방에 담아 간신히 살려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거의 3000쪽에 이르는 노트 가운데 일부를 모아 출판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그를 감옥에 집어넣은 조건이, 좀더 근본적으로는 대중들이 파시즘을 지지하고 그들을 따라 갔던 상황이 강하게 새겨져 있다. 

여기서 그람쉬는 마치 라이히가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던졌던 것과 비슷하게, 대체 왜 대중들은 자신의 계급적 이해와 반대로 파시스트를 지지했는지 묻는다. 이에 대해 그는 때로 노동자나 농민의 투쟁이라는 ‘자생적 사건’들로 인해 두려움과 증오를 갖게 된 사회계급들이 수동성을 벗어나 적극적인 반동에 나서게 되어 그렇다는 대답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정세적이고 단기적인 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태를 통찰하려 한다. 그리고 거기서 라이히와 달리 ‘서구사회 전반’에 특수한 어떤 새로운 정치학적 통찰을 얻어낸다. 

그는 파시즘이라는 특정한 사건을 넘어 ‘시민사회’라고 불리는, 강압과 강제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국가장치를 주목한다. 이른바 ‘민주주의’적 제도나 장치들이 확대된 선진 자본주의에서 ‘시민사회’가 경제적 파국이나 총파업 같은 ‘기동전’의 기습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복합적 구조를 형성했음을 본다. 시민사회에서 행해지는, 어쩌면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지배계급의 투쟁을 ‘기동전’과 대비하여 ‘진지전’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진지전을 통해서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고, 이러한 동의로 인해 그들의 지배는 단순히 힘에 의한 지배와 달리 동의와 동조를 수반하는 지적·도덕적 지도력을 행사하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동의를 수반하는 지적·도덕적 지도력를 그는 ‘헤게모니’라고 명명한다. 

특히 이런 맥락에서 그는 포드주의로 표상되는 미국 자본주의의 새로운 양상에 선구적인 관심을 표시한다. 즉 그러한 '미국주의‘가 때로는 테일러식의 ’시간연구‘나 ’동작연구‘ 등을 통해 생산과 작업을 합리화(기계화)하려 하는 한편, 고임금과 금주법 등을 통해 노동자의 생활방식을 ’합리화‘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유형을 만들어내려 한다는 점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아마도 나중에 뉴딜이나 케인즈주의로 진행될 국가의 적극적 개입정책을 이처럼 강제와 동의의 융합이란 관점에서 포착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실제로 매우 예언적인 통찰력을 갖는 것이었음을 굳이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그는 이제 국가를 ‘강제+동의’라는 간명한 공식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말하는 ‘동의’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어떤 사안에 대해 의견을 표시하는 어떤 행위의 양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의하는지 여부를 묻지 않은 채 얻어지는 ‘동의’고, 동의하지 않은 채 주어지는 ‘동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동의한다는 의식 없이 작동하는 ‘의식’이고, 그렇기에 차라리 무의식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덧붙여, 헤게모니의 개념을 그가 일종의 ‘지적·도덕적’ 지도력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그가 말하는 ‘지적·도덕적 것’이 무언가를 좀더 생각해볼 것을 요구한다. 그는 ‘도덕’이란 것을 정치학의 문제로 다루려고 한다. 도덕이 그것의 이유나 ‘근거’를 통해 사유될 때 그것은 윤리학의 주제가 되지만, 그것이 갖는 물질적 힘을 통해 사유될 때 그것은 정치학의 주제가 된다. 즉 그는 헤게모니나 진지전 등의 개념을 통해서 지배계급의 도덕이 어떻게 대중들의 동의를 산출하는 물질적 힘을 갖게 되는가를 사유하려는 것이었다. 헤게모니란 달리 말하면 도덕적인 요소가 물질적인 힘을 갖게 된 것을 지칭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국가=강제+동의’라는 공식 추출

그가 지식을 다루는 것 역시 이렇다. 가령 흔히 말하는 ‘상식’이 그에게는 중요한 연구대상이다. 그에게 상식이란 “특정 시기에 일반화된 무비판적·무의식적 비정합적 세계이해방식”이다. 그것은 도덕과 마찬가지로 대중을 사로잡고 그들의 ‘동의’를 산출하는 지적 성분인 것이다. 철학이란 이런 상식과 대결하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 대항하는 지적인 개입, 지적인 실천의 방법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은 철학자다”라고 정의한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인 ‘실천철학’이란 바로 대중의 ‘자생적 철학’(상식!)과 대결하는 실천적 활동인 셈이다.

‘시민사회’ 헤게모니에 포섭될 위험

요컨대 그람시가 옥중에서 하고자 했던 것은 시민사회의 발전이라는 서구 자본주의의 조건, 즉 자본주의를 일거에 전복하는 기동전이란 전술이 불가능하게 된 조건에 대한 연구였고,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진지전에 대항하는 혁명전략의 연구였다. 그리고 흔히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 대항하는 진지전을 그람시의 새로운 혁명전략이라고들 말한다. 그런 식으로 그람시는 시민사회론, 혹은 시민운동론의 주창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시민사회란 국가장치의 일부라는 것을 너무 쉽게 잊고 마는 것은 아닐까? 시민사회를 통해 운동을 헤게모니 장치 내부로 내부화할 위험을 너무 쉽게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덧붙여 나로선 피할 수 없었던 좀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었다. 진지전이 과연 진지전에 대항하는 투쟁방법일 수 있을까? 전쟁의 은유를 써서 말하자면, 서로가 진지에 앉아 자기 진지를 지키는 그런 전투를 상상할 수 있을까? 또, 진지전이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전투방법인데, 지킬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것이 과연 적절한 전술일까? 더불어, 나처럼 혁명이란 성공조차 버리고 떠나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유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진지전이 적절한 전술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부르주아지의 진지전에 대항하는 전술이란 대체 어떤 것이어야 할까? 

이 책은 질문으로 가득 찬 책이고, 또한 이처럼 질문하게 만드는 책이다. 손쉬운 대답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질문하는 것임을 안다면, 이것이 이 책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라는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서평자 추천 도서 

<그람시의 옥중수고Ⅰ, Ⅱ> ,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이상훈 옮김, 거름아카데미 펴냄. (Selections from Prison Notebooks의 국역본. 제목의 ‘수고’라는 말이 불편하다. Manuscipt의 일본어식 표현의 음역인데, 한국어로는 ‘초고’라고 하는게 오히려 나았을 듯)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이전> , 리처드 벨라미 엮음, 김현우·장석준 옮김, 갈무리 펴냄. (그람시의 투옥 이전 글의 모음집. 옥중수고와 비교해서 읽어도 좋다) 

<안또니오 그람쉬> , 쥬세페 피오리 지음, 김종법 옮김, 이매진 펴냄. (그람시에 대한 전기) 

<그람시의 여백> , 르네이트 홀럽 지음, 정철수 옮김, 이후 펴냄. (다양한 맑스주의 이론가 및 문예이론 등과의 관계 속에서 그람쉬를 현대적인 문화이론으로서 해석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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