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단지 ‘미친넘’에 속은 것인가?
[고전다시읽기]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철학
출처 : <한겨레> 2006년 03월 17일
[한겨레] 고전 다시읽기/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월드컵, 장갑차, 노무현, 황우석의 공통점은? 그렇다. 모두 대중과, 대중적인 운동 내지 대중적인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적극적인 지지나 반대의 의사를 표현하면서 하나의 흐름이, 대중이 되어 커다란 사건을 만들어냈다는 것. 사실 이런 식으로 대중에 대해 말하면, 어느새 87년 6월항쟁이나 7~8월의 ‘노동자대투쟁’ 혹은 광주항쟁 등을 떠올릴 것이다. 대중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 되어 만들어낸 사건들은 대개 이처럼 혁명이나 항쟁, 저항의 양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에 관심이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중을 혁명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지금은 잠재되어 드러나지 않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솟구쳐오를 혁명적 존재로. 이런 관념 속에 있는 한 2002년 월드컵의 대중이나 황우석 사건의 대중은 안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1930년대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 미친 듯이 몰려갔던 대중 또한 안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전세계 인민들의 숱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부시를 밀어주고 블레어를 밀어주는 대중, 혹은 지금은 천황이나 야스쿠니로 상징되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노선을 지지하는 대중들은 보이지 않을 게 틀림없다.
라이히가 이 책을 쓰던 시기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확실히 그랬다. 노동자를 포함해 인민대중들이 미친 듯이 히틀러와 나치에 열광하며 지지했지만, 그것은 모두 원래는 선한 그들이 ‘나쁜 넘들’의 속임수에 속아넘어간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거짓’을 폭로하면, 진실을 알려주면 대중이 혁명적인 본래 모습을 되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쓸 당시 라이히는 마르크스주의였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대중은 나치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나치가 말하고 행동한 것을 욕망했던 것이고, 총통에게 속은 게 아니라 총통에게 복종하기를 열망했던 것이다. 자신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억압할 게 분명한 것을 욕망했던 것이다. 마치 그게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듯이.
진정으로 혁명을 꿈꾸는 사람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대중은 왜 그게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 혁명적이어야 마땅한 계급의 대중조차 어째서 혁명이 아니라 반동을 지지하거나 욕망하는 것일까? 이 질문이 라이히로 하여금 바로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시간의 흐름에 밀려가지 않는 위대한 저작들의 대열에 들어가기에 충분하다.
라이히는 흔한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대중은 본래 혁명적이지만 속아서 저런 거라는 식으로 당혹스런 사태에 눈감지 않으며, 그렇다고 하이데거나 고상한 철학자들처럼 대중이란 속물적인 욕망, 복종적인 태도로 사는 ‘世人(세인)’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대중이 갖는 그 노예적이고 속물적이며 때론 반동적이기도 한 태도를 냉정하게 직시하며, 그것이 야기하는 사태의 일차적인 책임은 대중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하게 명시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러한 욕망이나 태도를 전환시켜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과 해방을 위해 일어서게 만들 수 있을지,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지를 탐색한다. 그래서 나는 그가 진정으로 혁명을 꿈꾸는 자였음을 확신한다. 진정 혁명을 꿈꾸는 자에겐, 어떤 계급이나 대중이 혁명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의당 혁명적이어야 할 그들이 혁명적이지 못한 이유를 찾는 게, 그들이 권위에 쉽게 복종하면서 또한 다른 이들을 복종시키길 욕망하게 되는 이유를 찾는 게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라이히의 이 질문이야말로 혁명을 꿈꾸는 모든 정치학이 대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말했던 것일 게다.
마르크스주의자인 동시에 프로이트가 아끼는 제자기도 했던 그는 정신분석학을 이용해서 이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물론 그것은 자신이 변형시킨, 생물학적 욕망과 오르가즘 능력이 강조된 정신분석학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욕망과 성격구조다. 그에 따르면, 대중이 혁명적이지 못한 것은 약한 자들에 대해서는 지배하려고 하지만 강한 자들 앞에선 굴종하려는 ‘권위주의적 성격구조’ 때문이다. 그러한 성격구조는 성적인 억압 때문에 발생한다.
아버지에 복종…성적억압의 산물
물질적 착취나 억압은 그에 대한 반역을 야기하지만, 성적 억압은 복종을 야기한다. 성적 억압은 “네가 원하는 건 네 엄마지?”라고 다그치며 욕망을 수치심으로 몰아넣는 한편, “계속 그러면 잘라버릴 거야!”라며 위협하며 욕망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억압은 오르가즘에 대한 공포를 낳고, 그것은 원하는 것에 도달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이러한 억압은 성을 아버지가 독점하는 가부장제와 더불어 작동한다. 총통에 대한 선망, 총통에 대한 복종,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을 야기하는 이 성적 억압의 산물이다. 자신의 욕망을 아버지로, 총통으로 대체하게 하는 이러한 억압은 또 대중으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도록, 아버지나 총통, 국가로 떠넘기게 만든다. 이것이 파시즘으로 몰려갔던 대중들의 심리, 요컨대 ‘파시즘의 대중심리’다.
그렇다면 권위주의적 성격구조를 혁파하고 해방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욕구의 충족이나 쾌락, 기쁨이나 즐거움을 죄악시하거나 적대시하는 금욕적 체제를 넘어서서 노동과 즐거움이 서로 합치하고 노동과 욕구의 충족이 서로 나란히 공존하는 그런 체제를 만듦으로써 가능하다. 노동이 고통이 아니라 즐거운 것이 되게 하고, 일이 싫어도 참고 하는 의무가 아니라 좋아서 즐겁게 할 수 있는 활동으로 만드는 것. 이러한 체제를 그는 ‘노동민주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술과 예술이 하나였던 장인적 생산체제로 돌아가길 꿈꾸지 않는다는 점에서 라이히는 노스탤지어를 먹고 사는 낭만적 몽상가가 아니다. 거꾸로 그는 기계적 합리화나 분업을 유지하면서 노동이 즐거운 활동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를 위해선 노동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에서 설계되어야 하며, 작업 자체를 일하는 노동자 자신이 직접 결정하고 실행하며 관리하는 작업장 자치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것을 통해 노동자 자신이 작업은 물론 경영 전체를, 나아가 집단의 활동 자체를 직접 책임지고 관리하는 자기-책임(자율주의)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한 때 소련의 사회주의혁명에 큰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그는 노동민주주의를 향해 거대한 일보를 내디뎠던 이 혁명이 30년대 들어가면서 또 하나의 권위주의적 국가체제로 후퇴했음을 냉정하게 지적한다. 예컨대 노동자의 자주관리는 중앙에서의 결정이 집행되는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국가장치와 국가적 통치자로 대체되고, 자발적인 노동은 성과급이나 5개년 계획기간 동안 직장을 고정하는 제도(그는 이를 ‘자물쇠’라고 부른다)에 의해 의무가 된다; 게으른 노동자와 성실한 노동자를 게시하는 제도를 통해 한편에선 수치심과 열등감, 질투심과 증오심을 유발하고 다른 한편에선 승리감과 공명심, 야심과 자만심을 배양하는 권위적 성격구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스타하노프 운동 식의 노동경쟁체제로 노동자 내부의 분열과 적대가 발생하고 심화된다 등등. 대다수 대중을 무능력하게 만드는 이런 요소에 대한 이 책의 분석은 사회주의 소련의 붕괴를 목도한 이후의 어떤 책들보다도 더 예리하고 현실적이다.
공산당과 정신분석협회서 쫓겨나
이 탁월한 책이 제대로 된 독자를 발견했던 것은 혁명과 사랑, 혁명과 욕망을 연결하고자 했던 1968년에 이르러서였다. 니체 말처럼 그는 너무 빨리 왔던 것일까? 그러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늦게 왔던 것일까? 어쨌건 그의 책이 갖는 이 '반시대성‘으로 인해 그는 혁명을 하고자 했지만 공산당에서 쫓겨났고, 성과 욕망, 무의식에 대해 연구했지만 정신분석협회에서 쫓겨났으며, 나중엔 정신과의사들의 집요한 로비로 미 식품의약청에 의해 체포·투옥되어 옥사했다. 그의 시간이 오기 이전인 1957년에. 그러나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그랬듯이, 그를 죽인 사람들은 이미 누구도 기억되지 못하지만, 이 책은 이후에도 오랜 시간 살아서 그의 시간을 지켜볼 것이다.
서평자 추천 도서
<파시즘의 대중심리>,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그린비 펴냄(2006) (독일어 초고로 새로 번역된 책)
<오르가즘의 기능>, 빌헬름 라이히 지음, 윤수종 옮김, 그린비 펴냄(2005) (라이히의 성격분석기법이나 성 과학의 핵심을 보여주는 책)
<빌헬름 라이히>, 마이런 섀라프 지음, 이미선 옮김, 양문 펴냄(2005) (라이히의 ‘환자’이자 제자였던, 지금은 하버드대 의대 교수인 정신의학자가 쓴 라이히 전기)
50자 서평
◇ 한 30대 독자 “파시즘이라는 유령이 전 세계를 떠돌고 있는 이때 이 책은 파시즘적, 외디푸스적, 가족주의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한다. 사랑하라. 일하라. 자유롭게!”
◇ 김상운(인터넷서점 알라딘 독자) “‘운동’으로서의 파시즘을 분해함으로써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신우익의 발호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만들어 주는 파시즘과 국가주의 연구의 살아 있는 고전.”
◇ 김민규(회사원) “수십 년 전에 있었던 비극뿐만 아니라,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 없는 비극들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시대의 역작.”
◇ 김희진(인터넷서점 예스24 회원) “가장 강력한 반동적 정치를 만들어내는 건 스스로 비정치적이라 느끼는 사람들의 예의바름과 신비주의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파시즘을 우려해야 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 다음주 이후 고전 <나는 고발한다>, <노자>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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