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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노마디즘 ①] 실체 없는 ‘유목주의’ 이미지만 떠돈다 / 홍윤기

by 내오랜꿈 2007.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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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 없는 ‘유목주의’ 이미지만 떠돈다
[기획]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⑤ -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① 

홍윤기/동국대 철학과 교수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 12 28 


» 노마디즘은 저항의 철학인가 침략의 철학인가? 홍윤기 교수는 노마디즘이 실체는 없이 이미지만 떠도는 실험 단계의 기획에 불과하다는 관점을 보였다. 칭기즈 칸의 동상,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어린이, 태극기를 들고 있는 한국 국적 취득자들(왼쪽부터).〈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 논쟁 ⑤ 

① 개념부터 확정해야 

유목주의로 옮겨지는 노마디즘(nomadism)이 국내에 본격 알려진 시기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저 〈천의 고원〉(1980) 해설서 〈노마디즘 1·2〉가 나온 2002년께다.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가 쓴 이 책에서 노마디즘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붙박이지 않고 끊임없이 탈주선을 그리며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행”으로 규정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특히 그들의 저서에서 “국가로 상징되는 고착된 가치에 맞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도구”로 ‘전쟁기계’를 노마디즘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 내세웠다. 
노마디즘은 지난해 ‘농사꾼 철학자’ 천규석씨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란 책을 내놓으면서 논쟁이 일었다. 천씨는 다리를 놓고 길을 내며 질주하는 유목의 세계에서 반생태성과 비지속성 그리고 ‘침략과 파괴의 역사’를 읽어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노마디즘은 칭기즈 칸의 세계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외형상의 유목이나 움직임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홍윤기 교수는 이번 글에서 노마드라는 용어 안에서 수많은 노마드들이 서로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하거나 대립·공존하고 있음을 우선 지적한다. 자크 아탈리류의 ‘시장 노마드’나 첨단기기로 사이버공간을 가로지르는 ‘고급소비자 노마드’라고 해서 진정한 노마드가 아니라고 배제되어야 할 특별한 이유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홍 교수는 노마드들이 갖고 있는 의미가 특정 규정으로 결정력을 발휘하는 ‘개념’으로 총집되지 못하고 다감각의 ‘이미지’로 교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노마디즘은 ‘개념’과 실행’이 부족한 탈현실 기획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노마디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나의 응답부터 말하자면, 아직 ‘어떻게’ 봐야 할 ‘그 어떤’ 노마디즘 같은 것은 우리 생활 안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말을 써서 모종의 효과를 유발하고자 하는 이미지들은 우리 주변에 넘친다. 그리고 이 효과들은 상호 충돌한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변화무쌍한 그 용어의 용례들부터 정리하고 나서야 가능할지 모른다. 

1.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공저 〈천의 고원〉이 역사학을 제외한 인문학계와 일부 사회학자들, 그리고 학문적 유행에 민감한 언론계, 소비자 취향에 집중하는 사업계 등의 지도적 인사들로 하여금 노마디즘을 일상적으로 입에 달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들은 “1227년”이라는 암호 같은 연대를 앞세운 이 책 12장의 표제를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라고 붙이면서 “전쟁기계는 국가 장치 외부에 존재한다”는 알 듯 모를 듯한 진술로 그 장을 시작한다.(유목민의 최고 상징 격인 칭기즈 칸은 바로 이해 8월18일 서하(西夏) 정벌 중 병사했다.) 이때 “전쟁”을 무엇으로 이해했든 들뢰즈·가타리는 전쟁과 관련된 유목민의 역동성 같은 것이 “국가”의 영토성을 근본적으로 해체하는 탈국가적·탈경계적 추진력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했다. “전쟁기계는 유목민의 발명품이다”라고 주장하는 두 사람은 “불복종 행위, 봉기, 게릴라전 또는 행동으로서의 혁명이라는 반국가적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전쟁기계가 부활하여 “새로운 유목적 잠재세력”이 출현한다는 일반명제를 제시했다. 

탈국가 지향하는 제2의 칭기스칸
사이버 공간 활보하는 고급 소비자들
모든 문명 내던지는 원시 회귀 까지
수많은 노마드 주장들 대립·공존
 

2. 문제는 이들이 그렇게 타파하려는 국가가, 민주적이든 독재적이든, 어떤 종류의 국가인지는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국가는 그 자체로서 이미 어떤 형태이든 “포획 장치”이다. 그리고 이들이 그렇게 작동시키고자 하는 전쟁기계의 목표가 반드시 전쟁은 아니라는 언명은 전쟁을 게임 속에서의 경쟁쯤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정도로 문제의 진지성을 약화시킨다. 하지만 전쟁 기계의 가동이라는 명목 아래 국가뿐만 아니라 노동·상품·자본 등 “포획”을 연상시키는 모든 제도 장치로부터의 탈주를 권장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전면적 탈경계 기획은 그 실천적 함의가 대단히 다양하다. 

3. 이것을 문명의 모든 성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경우 그것은 원시로의 회귀까지 각오한 급진적 생태주의가 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때의 탈주는 역진적 퇴주가 되는 셈이다. 

4. 만약 탈경계의 지향점을 문제삼지 않을 경우, 삶의 조건과 영역에 처진 경계들 그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왕래하거나 이동할 수 있는 일체의 행위와 생활양식은 모두 노마드적이다. 인간이란 “여행을 존재의 본질”로 한다고 하여 ‘호모 노마드’를 부각시킨 자크 아탈리는 세계화된 지구시장을 그 옛날 대상로가 거미줄처럼 얽혔던 실크로드로 간주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노마드로서 진화의 최종점에 도달하며, 이들이 전세계를 장악하기까지의 무질서 너머로 “모든 인생 여행자들을 환영하는 땅”이 전개된다고 고무한다. 

5. 당연히 아탈리류의 시장 노마드는 세계 자본 순환과 그것의 외양인 제국에 완전히 포획되어 그 안에서 이익에 혈안이 된 “여행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여행자는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다. 농촌자치 공동체를 꿈꾸는 농민 철학자 천규석 선생에게 이런 “유목주의는 침략주의이다.” 

6. 그렇지만 자본과 제국의 포획 안에서 자신의 생활압박 때문에, 베네치아에서 출생하고 호주에서 성장하다가 프랑스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네덜란드에서 교수로 취업한 로저 브라이도티 같은 이에게 유목적 주체란 연속된 이주로 복잡화되고 다층화된 수많은 다양한 타자들 사이의 다양한 정체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7. 그러나 자본의 속도는 유목민의 다양화를 앞질러간다. 이미 시장에는 마셜 매클루언의 예언대로 “휴대전화, 노트북 컴퓨터, 피디에이(PDA), 디지털카메라, 엠피3(MP3)을 갖춘” 고급 소비자들이 노마드를 자칭하면서 사이버공간이라는 새로운 무한 초원을 무대로 “공간의 물리적 이동만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와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하게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법을 능동적으로 바꾸어가는 창조적 행위”를 감행하고 있다. 

21세기판 유토피아 꿈꾸는 노마디즘
개념·실행 없는 ‘탈현실’ 실험일 뿐
찬반을 말하기엔 아직 일러
변화무쌍한 용례들부터 정리해야
 

자, 위의 노마드 또는 유목민의 사례들 가운데 자기만 빼고 다른 것은 진정한 노마드나 유목민이 아니라고 얘기할 권리가 있는 진정한 유목민은 몇 번인가? 그 의미가 어떠하든 노마디즘은 어떤 동기나 근거에서든 21세기 현재의 (지구)사회적 지형 위에서 과거의 ‘유토피아’ 구상을 대체하는 탈현실(post-reality) 기획이다. 그야말로 노마드라는 용어 안에 수많은 노마드들이 서로 경계를 허물면서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하거나 대립하거나 공존한다. 이때 의미들(senses)은 특정 규정으로 결정력을 발휘하는 ‘개념’으로 총집되기보다 다(多)감각(multi-sense)의 ‘이미지’ 파문으로 교착한다. 

다만 노마디즘 기획은 노마드를 바로 지금 이곳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유토피아 구상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탈경계의 이동이나 탈주를 하는 듯이 보이는 소수 엘리트층 또는 자기 땅에서 밀려나 탈국가적으로 이동해야 하는 수많은 빈민이나 노동 이민자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진경 교수의 말대로 이들은 “떠돌아다니지만 끊임없이 어딘가 멈출 곳을 찾는” ‘실질적 고착자들’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역시 이진경 교수의 구상을 빌려, 떠남/멈춤의 이동성을 신체물리적 차원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과 갈등을 자유자재로 읽고 사유하는 한층 정신적인 차원에서 유목성을 추구해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유목성이 국가·자본·시장과 같은 외적 준거점을 떠나 정신과정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그런 관념적 유목성이 들뢰즈·가타리가 “모델을 늘리지 않으면서” 끝까지 놓지 않으려던 “매끈매끈한 판”을 슬그머니 놓아버리고 홈 안으로 몸을 도사리는 것임을 금세 눈치챌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단지 탈주의 기획을 말했을 뿐이다. 그것은 노마드에서 많은 것을 학습하는 과정, 곧 노마돌로지(유목론)적 탐색이긴 해도 노마드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노마디즘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 홍윤기 교수

노마드나 노마디즘은 거기에 대한 찬반 의견을 말하기엔 그 자체의 ‘개념’과 ‘실행’이 현실적으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태부족한 실험기획이다. 더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결국 인정했듯이 노마드 그 자체에서도 벗어나는 것이다. 곧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의 매끈한 공간만으로 충분하다고는 절대 믿지 말라.” 

홍윤기/동국대 철학과 교수 



홍윤기 교수는 1957년생으로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철학박사를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사회통합의 규범기반 모델, 그리고 문화적 가치의 철학적·사회과학적 실현 등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변증법 비판과 변증법 구도> <헌법 다시 보기>(공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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