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5일 아침, 우리 집 근처 어느 논 풍경. 써레질을 마친 무논에 손가락 두세 마디 정도의 볏모가 줄지어 서 있다. 4월 하순의 모내기 풍경. 낯설다.
이 지역에 터를 잡은 지 8년. 여수에서의 생활까지 포함하면 15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익숙해질 수 없는 광경들이 더러 있다. 세 가지만 꼽자면 콩국수에 소금이 아니라 설탕을 넣어 먹는 것, 맹물에 국수를 말아 설탕을 숟갈 가득 네댓 스푼씩 넣어 먹는 것. 추석,설 명절 차례를 당일 아침이 아니라 전날 저녁에 지내는 것. 물론 마지막 세 번째 광경은 남도 일반이 아니라 이곳 고흥만의 독특한 문화이긴 하다.
2003년, 처음 여수에 왔을 때 직원들과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콩국수 집을 갔다가 설탕으로 간(?)을 맞춘 콩국수를 먹다 뱉어낸 경험이 이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체험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내게 익숙한 콩국수는 삶은 콩을 갈아 국물을 만들고 여기에 삶은 국수를 넣은 뒤 소금으로 간을 하는 방식이다. 아마도 우리 나라 대부분의 지역을 포괄하는 전국 표준일 것이다. 그런데 여수, 고흥, 보성, 장흥 등으로 연결되는 전남 남부 해안지역은 콩국수에 소금이 아니라 설탕을 넣어 먹는다. 지금이야 이 지역에도 소금과 설탕을 함께 내놓는 콩국수 집이 많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소금 그릇은 구경도 할 수 없었을 뿐더러 콩국수에 설탕이 미리 들어가 있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40년을 소금으로 간을 맞춘 콩국수 먹다 설탕 들어간 콩국수 한 번 드셔 보시라. 뱉어 내는가 아닌가. 더 살다 보면 언젠가는 익숙해질 수 있을까?
두레 문화가 살아 있던 시절, 모내기철이나 수확철에 논두렁에 앉아 새참 먹는 풍경은 어린 시절을 추억하자면 빠질 수 없는 그림이다. 진한 멸치 육수에 삶은 국수와 살짝 데친 부추를 듬뿍 넣은 잔치국수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사발. 이 이상은 사치이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의 추억일 뿐이지만 국수 한 그릇이 더없이 행복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조차 '같은 그림 다른 추억'이 지배하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여수를 축으로 장흥, 해남에 이르는 남도 해안 지역은 이 새참으로 먹던 잔치국수조차 멸치 육수가 아니라 맹물에 설탕을 네댓 숟가락 가득 넣어 먹던 추억이 지배하는 곳이다. 입에 들어가지 않아도, 설탕 네댓 숟가락 넣는 모습만 상상해도 토할 것 같은 그림. 살다 보면 과연 익숙해질 수 있을까?
양친 다 돌아가신 지 5년이 넘었다. 자연히 명절 차례상의 의미도 내 생활에서 서서히 퇴색하고 있다. 살아생전에 잘 하지 돌아가신 다음 제사니 뭐니 무슨 헛짓 하냐는 사고방식을 가진 내 입장에서는 제사나 차례상을 중요시하는 관습 자체가 고깝게 보일 따름이다. 형님네 조카들 결혼한 뒤로는 명절 차례상 지내기 위해 서울까지 왕복하는 일도 그만둔 상태다. 그러니 차례상을 명절 아침에 지내든 전날 저녁에 지내든 나와는 무관한 관습일 뿐인데, 알고 보니 명절 전날 저녁에 차례상을 지내는 건 남도 바닷가 지방 중에서도 유독 고흥만의 특색인 거 같다. 이건 특정 지역의 식습관 같은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와 관용이 필요한 문화 현상일 터인데 그 지역이 너무 협소한 특정 지역이기에 그 이유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7~8년을 살았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명확한 답을 듣지 못한 이 지역만의 특색. 이유를 모르기에 익숙해질 수 없는 관습 같은 것!
이와는 달리 관습도 아니고 이유도 알고 있는 4월 하순의 모내기 풍경이지만 몇 년을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따뜻한 지역일수록 모심기는 늦을 수밖에 없다. 늦게 심어도 문제될 게 없을 정도의 일조량이나 적산온도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기에. 그런 지역에서 모내기를 일찍한다는 건 점점 더 이모작을 하지 않고 있다거나 조생종 벼를 재배하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음에도 4월의 모내기 풍경은 여전히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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