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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문화예술

<박쥐> - 죄다 여자 탓…찌질한 남자 영화

by 내오랜꿈 2009.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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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다 여자 탓…찌질한 남자 영화 
[세상 vs 영화 마주서다] 여자 잘못 만난 남자의 분투, <박쥐>

이안젤라 / 영화칼럼니스트 
출처 : 레디앙 2009년 05월 08일(www.redian.com

* 이 글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금기를 욕망하는 죄의식에 대한 영화인 줄 알고 봤더니 좌절된 가부장이 여성에 대해 품은 원망과 앙심에 대한 영화였다.

 

그러니까 <박쥐>는 인간의 피를 마시는 극단적 방식으로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며 죽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매혹을 이야기하는 고전적 뱀파이어 이야기의 전제와도 상관없고, 그 금기된 욕망을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표현되는 아찔한 유혹의 성애나 욕망의 대가로 치르게 되는 혹독한 처벌의 공포와도 상관없다. 

<박쥐>는 제작발표회에서 감독이 했던 말 그대로 ‘여자를 잘못 만나서 아주 곤경에 빠진 남자의 분투’라는 단순한 이야기다. 여자의 처지나 고통보다는 서로 영향을 주고 변해가는 남녀 관계에서 여자 때문에 고생하는 남자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있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영화는 아주 난삽하다. 아는 것도 많고, 본 것도 많은 감독이 여기저기서 끌어들일 수 있는 온갖 이미지와 장르를 범벅 해놓고는 그것들이 죄다 어디서 끌어들여진 개념이고, 어디서 빌려 온 장면인지 알아맞힐 수 있는 만큼 맞춰보라고 딴죽을 건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영화가 친숙하고 쉽게 느껴질 것이라던 감독의 설명은 정직했고, 이 친숙하고 쉬운 남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역겨움 또한 당연히 따라 오는 것이다.

 

남자 죽이는 바이러스는 이브

<박쥐>는 모든 것이 여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책임을 돌린다. 원인모를 병으로 오직 남자들만 죽어가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의 이름이 이브란다. 가톨릭 사제인 상현이 이브가 어찌 생겨났으며 어떤 역할을 한 존재인지 왜 모르겠는가. 이브는 ‘아버지’ 하느님이 아담을 재워놓고 그 갈비뼈를 슬그머니 취해 만든 반려가 아니던가?

 

이브랑 알콩달콩 잘 지내다가 아버지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며 같이 선악과를 따먹어 놓고는, 왜 그랬느냐는 질책에 다 저 여자가 시킨 일이라고 핑계를 대던 아담의 치사스런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인류를 구원하는 거창한 사업에 희생양이 되어보겠노라고 자원해서 받은 실험의 부작용으로 뱀파이어가 되어놓고는 그게 다 이브 때문이란다. 죽어가는 인간을 살리는 구원 사업이 신의 영역이라고 믿기에 사제가 된 사람이 막상 자기 욕망에 눈을 뜨는 순간 그게 다 모성결핍이며, 여성의 탐욕 때문이란다.

 

가톨릭에서 하느님의 대리자인 성직은 오직 남성의 전유물이다. 사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남성 뿐, 여성은 성무를 집행할 수 없고 기껏해야 수녀가 되어 정결한 수도의 길에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을 뿐이다.

 

  

  ▲ 영화의 한 장면

 

단 하나, 처녀의 몸으로 성자 예수를 낳았다는 동정녀 마리아만이 믿고 따를 수 있는 구원의 여성이다. 그러니 처녀가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갖지 않는 한 모든 여성은 성스러울 수 없는 것인데, 하느님이 인정하는 혼배성사를 통해 맺어지지 않는 남자의 아이를 갖는 것 또한 죄악시하는데다가 자연스럽지 않은 임신을 옳게 보지 않으니 수녀가 되든, 어미가 되든 여성은 고귀하게 되기는 글렀다.

 

코미디 영화 <박쥐>

 

그러니 고아원에서 자라나 사제가 된 상현이 홀로 몸도 마음도 모자란 자식을 키워낸 친구 어머니의 보살핌을 불편해하는 척하면서 기꺼이 받아들이고, 권태와 불만에 찌든 친구 아내를 위로하는 척하면서 욕망하고, 희생과 봉사를 통한 구원의 길에 회의를 품고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수녀의 고해를 듣고 죄를 사하는 척하면서 그 피를 식량으로 삼아 자기 목숨을 연명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박쥐>는 코미디가 된다. 

<박쥐>의 상현을 둘러싼 남성들은 모두 거세되어 있다. 이브 바이러스를 통해 얻은 병은 온몸에 물집이 잡히고 썩어 들어가게 만들 만큼 지독하지만, 여성과의 올바른 사랑을 통해서가 아니라 흡혈을 통해서 쉽게 치유된다.

 

요즘 세상에 조건만 갖춰지면 생피 구하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랴. 처음 흡혈의 욕망에 눈 뜬 상현이 목마름과 애욕을 구분해서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의 피를 남몰래 쪽쪽 빨아 먹는데, 스스로에게는 관대하면서 육체적으로 발기하는 남성으로서의 자신을 물리적으로 처벌하는 모습부터가 어리석기 그지없다. 

이브 바이러스로 고통받을 것인지, 피를 마시고 잠시나마 병을 가라앉힐 것인지를 고민하는 상현에게 자기 핏줄을 칼로 그어 꿀꺽꿀꺽 마시게 해준 선배 사제는 눈은 있으되 보지 못하고 다리는 있으되 걷지 못하는 의존적 인물이다.

 

상현을 고아원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으며 어쩌다 상현이 뱀파이어가 되었는지도 잘 알기에 가톨릭 입장에서는 꺼림칙하기 짝이 없는 뱀파이어에게 기꺼이 피를 내주는 관대한 존재인가 싶었던 스승이자 아버지같은 이 노사제가 바라는 건, 알고 보니 상현의 치유가 아니라 자기 치유, 자기 욕망의 실현이다. 가련한 노사제의 욕망이 드러나자마자 상현은 그를 버리고, 기만하고, 죽여 버린다.

 

상현의 친구 강우는 멀쩡히 마작패는 맞출 줄 알면서도 제 손으로는 줄줄 흐르는 콧물 하나 닦을 줄 모르고, 남들 다 덥다는데 혼자 춥다며 식어버린 핫팩에 더운 물 하나 갈아 넣을 줄 몰라 엄마를 찾고, 아내를 부른다.

 

모두 거세되어 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아내 태주의 몸을 움직이게 만들어야만 만족하는 강우가 그렇게 반편이가 된 것도 드센 엄마 탓으로 돌린다. 홀몸으로 생계를 꾸리며 몸도 마음도 모자란 아들을 키우느라 힘들었을 어머니의 희생이 외려 자식에 대한 추한 집착으로 그려진다. 지친 아내의 몸과 마음을 보듬어줄 줄은 모르는 주제에 죽어서까지 엉겨붙어 괴롭히다가 겨우 태주까지 뱀파이어가 되고나서야 떨어져 나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지독한 장면 가운데 하나인 상현과 태주의 섹스 장면에서 둘 사이에 끼어 헤헤거리며 웃고 있는 강우의 모습은 낭자하게 흐르는 피나 찢겨나가는 살점, 부러져 튀어나온 뼛조각보다 더 섬뜩하게 여성에게 칭얼대는 ‘남성’의 초상이다.

 

  
  ▲ 영화의 한 장면

뱀파이어가 된 상현은 또 어떤가? 사람의 생피를 탐하게 된 주제에 날카로운 송곳니 하나 갖추지 못해 남의 핏줄에 연결된 주사관으로 어린 아기 젖병 빨듯 피를 빨지 않나, 막상 애욕과 갈증을 동시에 해결할 절호의 기회인 섹스를 하게 된 순간 짜릿한 고통과 희열을 동시에 줄 수 있을 제대로 된 흡혈은커녕 애꿎게 가녀린 목덜미에 이빨 자국이나 내서 여자한테 ‘나 변태인가 봐’ 소리나 하게 만드는 주변머리로 뱀파이어라니.

 

대가 센 친구 어머니에게 의지해서 무능한 친구 집에 끼어들더니 친구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는 처지가 된 건 옳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말린 상황이라 치자. 그 상황에서 남편이 자기를 육체적으로 학대한다는 여자의 말만 듣고 친구를 죽이겠다고 나서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데, 나중에 여자의 하소연이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상욕을 해대며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은 얼마나 추잡한지.

 

명색이 구원의 사도가 되겠다는 자가 그만한 판단력도 없었으면 자기 자신의 미욱함을 탓할 일이지 남 탓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진실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거짓을 믿어 욕망을 채우고 싶었던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리라.

 

뱀파이어인가, 변태인가?

 

오히려 태주는 당당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하다. 괴로워서 못살겠다며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고 도발한다. 그런데 이런. 상현은 죄의식에 시달려 죽음을 택하려는 태주를 연민 때문이 아니라 분노 때문에 인간적인 방식으로 때려죽이더니 막상 죽은 태주를 뱀파이어적인 방식으로 살려낸다. (산 채로 흡혈을 통해 뱀파이어가 된 것도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건 장르적으로는 반칙이다. 이건 뱀파이어가 아니라 좀비가 되어야 하는 건데.)

 

그러더니 뱀파이어가 된 태주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다는 이유로 태주를 가혹하게 폭행한다. 자기가 태주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놓고는 태주 때문에 자기가 수렁에 빠졌다며 같이 지옥에 가잔다. 영화 포스터에서는 ‘내가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 줄게요’라고 장담하더니 막상 영화 본편에서는 ‘지옥에서 만나자’고 한다. 뻔뻔하기도 하지. 

<박쥐>는 찌질한 남성의 오늘을 비추는 초상이다. 자기가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가로막힌 것은 다 드센 엄마 탓이고, 자기가 대단한 존재가 되지 못한 것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여인의 욕망에 휘말렸기 때문이란다. 저지른 건 자기면서 핑계는 잘도 가져다 붙인다.

 

  
  ▲ 영화의 한 장면

 

감독은 시치미 뚝 떼고 구원이니, 숭고니, 에로스니, 타나토스니, 빛이니, 어둠이니 하는 논란거리를 던졌는지 몰라도 그 핵심은 남성의 거세 공포를 오만 가지 B급 영화 스타일로 포장해 놓은 오락거리다. 그런데 그 오락은 폭력과 유혈, 농담과 뻔뻔함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하다.

 

여기서 어떤 메시지를 찾거나 ‘여자가 뭘 어쨌다고?’하면서 발끈할 양이면 그 초대에 응하지 말 것이며, 영화적 테크닉이 주는 쾌감이나 역겨움을 즐길 양이면 영화퀴즈 풀듯 장면 하나하나 풀어볼 일이다. 아니면 한국적 뱀파이어는 역시 가부장 그 자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든가. 가부장, 이 지긋지긋한 괴물은 죽을 때도 혼자 죽지 못하고 왜 여자를 악착같이 끌고 가는지.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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