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코스 : 백무동 -->장터목 --> 천왕봉 --> 장터목 --> 백무동
길이 : 15KM
소요시간 : 8시간 30분
거의 10년 만에 계획한 지리산 등반. 10월 징검다리 연휴의 막바지에 길을 나섰으니 고생하는 게 당연지사. 우리야 워낙에 한적한 촌동네에 살다 보니 차 막힐 일 없지만 동행하기로 한 팀들은 서울과 부산에서 오는지라 이래저래 고생인 모양이다. 1시에 만나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약속은 물 건너가고 3시가 넘어서야 겨우 모두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애초의 계획은 점심을 먹고 성삼재로 가서 차를 두고 노고단까지 걸어갔다가 오는 것. 천왕봉은 둘쨋날에 가기로 했기에 첫날은 가볍게 산책 정도만 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계획대로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바로 백무동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날이 날인지자 성삼재 넘어가는 길 또한 만만찮다. 시암재를 지나고부터 성삼재 휴게소 가는 굽잇길이 주차된 차들로 넘쳐난다. 20여 분을 지체한 끝에 겨우 올라선 성삼재 휴게소. 눈으로만 멀리 노고단의 모습을 간직한 채 서둘러 백무동으로 가는 길. 바쁜 우리 마음을 모르는 차들을 추월해가며 백무동에 도착하니 5시가 가까워온다.
짐을 내리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빈 자리가 드물다. 우리처럼 등반을 위한 야영도 있지만 오토캠핑장에 가는 게 어울리는 팀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마치 집안의 살림살이를 다 옮겨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온갖 캠핑장비들이 넘쳐난다. 우리 일행은 그야말로 야영을 위한 최소한의 장비만 있는 까닭에 텐트 설치와 짐을 정리하는 것도 10여 분 만에 간단하게 끝이 났다. 특별히 달리 할 일도 있는 게 아니니 바로 밥 먹자며 저녁 준비를 시작한다.
이 팀들과는 재작년에 소백산 눈꽃 산행, 올해 초의 무등산 산행을 같이 했었다. 겨울 소백산의 그 모진 칼바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오를 수 있는, 어떤 곳에도 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친구들이다. 대학 후배들인데 이 친구들이 입학하면서 알게 되었으니 만난 지가 35년이 넘었다. 내일 천왕봉까지 올라가야 하니 가볍게 한 잔 하자며 삼겹살과 소주로 시작한 저녁이 한밤중까지 이어진다.
6시부터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고 부산하게 움직였는데도 8시가 넘어서야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의 키포인트는 아무래도 저 부자지간이 될 거 같다. 천안의 어느 대학 교수로 있는 후배의 늦둥이 아들인데 10살이다. 서울에서 관악산이나 도봉산 등에 데리고 다녀보니 크게 문제가 될 건 없겠다 싶어서 데려왔다고 한다. 다만 얇은 침낭으로 인해 간밤에 텐트 속에서 떨고 잤다고. 10도씨 이하로 내려가는 산속에서의 하룻밤은 준비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악몽이다.
백무동에서 장터목으로 오르는 길. 꽤나 가파른 길에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했던 80년대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백무동 계곡길은 잘 닦인 도로 같아 보인다. 주변에 흩어진 돌들로 조각 맞추듯 등산로를 잘 정비해 놓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배낭을 벗어던지고 드러눕고 싶은 생각뿐이다. 머리는 아프고 속은 안 좋고 발은 떨어지지 않는다. 지난 밤의 술이 문제인 것. 계곡을 벗어나 능선길에 오른 뒤에는 물들어가기 시작한 단풍과 눈 앞을 스쳐지나는 구름도 손 뻗으면 잡힐 만큼 가까이 있건만 즐길 여유가 없다.
그렇게 아무런 생각없이 3시간 여를 걸어서 다다른 장터목 대피소. 그제서야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고 물들기 시작한 단풍들도 눈에 들어온다. 아직 12시가 안 되었는데도 취사장 안은 이미 점심을 먹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운 좋게 데크를 하나 잡고 앉았다. 천왕봉을 갔다 와서 점심을 먹을까 먹고 갈까를 잠시 고민하다가 갔다 오면 너무 늦을 거 같아서 라면을 끓여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 것.
거의 20여 년 만에 보는 장터목 산장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다. 그 사이에도 지리산을 몇 번 왔었지만 노고단이나 세석, 삼신봉 등에만 올라갔다 바로 내려가는 바람에 천왕봉 근처에는 올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삼십대 후반의 젊은 청년은 이미 흐르는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육십이 되어서야 사라진 시간을 끼워맞춰 보고자 하나 찾을 길이 없다.
어수선한 장터목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 제석봉으로 오르는 길. 길 양편으로 군데군데 고사목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의 인생. 사람들의 눈에는 마냥 아름답게 보이는 이 풍경들이 사실은 인간들의 욕심이 빚어낸 재앙으로 생겨난 것이다. 1950년대에 지리산에는 벌목꾼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들이 이 제석봉 인근의 목재들을 도벌한 다음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불을 놓았던 것. 못살았던 시절이고 생각 없었던 시절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의 어떤 행위들은 가끔씩 상상을 초월한다.
제석봉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천왕봉. 쉴 새 없이 구름이 오르내리는 터라 수시로 천왕봉이 보였다 말았다를 반복하고 있다. 그런 천왕봉을 바라보며 우리가 오르는 길을 수많은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천왕봉에서 기념촬영도 못 했다고 투덜거리면서. 우리 입장에서 보면 다행인 건 내려오는 사람은 많은데 오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점심시간의 한가운데라는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장터목에서 주변 풍경 감상하며 걷기를 1시간. 드디어 천왕봉이다. 의외로 운무도 없고 바람도 약하다. 사람들도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 동행한 이들 모두 천왕봉에서 이렇게 좋은 날씨를 구경한다는 게 신기하다고 한다. 간단하게 기념사진을 찍고 표지석 주변의 바위에 걸터 앉아 말없이 주변을 둘러 본다.
쳐다보는 곳 어디나 모두가 그림 같다. 구름이 내 눈높이에서 천왕봉 주변에 둥그런 띠를 형성하고 있다. 카메라 렌즈가 제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의 눈을 따라갈 수 없다는 걸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이 사진이 아니라 내 눈에 비친 천왕봉에서의 풍경을 재현해낼 수만 있다면 그걸 올리고 싶다. 그렇게 30분 정도, 사방을 둘러보고 앉아 있었다.
내 기억에 40년 전, 처음으로 천왕봉에 올랐을 때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한여름에 추워죽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법계사에서의 하룻밤을 견디고 올라간 천왕봉은 사납게 불어대는 비바람에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올랐지만 천왕봉은 나에게 이렇게 좋은 날씨와 여유 있는 감상을 허락했던 적이 없었다. 그 모든, 오래된 기억들을 털어내게 만드는 시간.....
언제 또다시 천왕봉을 오르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설혹 다시 못 오른다 해도 어딘가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했던 아쉬움과 미련을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여유로움을 켜켜이 쌓는 시간.....
그렇게 30여 분을 보내다 짧은 가을해를 걱정하며 하산길을 서두른다.
202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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