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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키에르케고르 - 교회의 비판자, 실존주의의 선구자

by 내오랜꿈 2010.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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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

교회의 비판자, 실존주의의 선구자


출처:네이버 캐스터(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88&contents_id=4267)

일시:2010.12.19

글:서동욱




1855년 11월 11일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의 장례식은 같은 달 18일에 치러졌다. 군중들은 살아생전 그토록 강력하게 덴마크국교회를 비판한 자의 시신을 교회가 거두어들이는 처사에 불만을 품고 거의 폭도가 되다시피 했다. 원만하지 않은 과정 뒤에 그의 시신은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정확히 어디에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맏형이자 나중에 교회의 감독이 되는 페터가 질투와 증오심 때문에 동생의 시신이 어디 묻혔는지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은 까닭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논쟁적 책들은, 그날 저자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20세기 초 야스퍼스(K. Jaspers)와 하이데거(M.Heidegger) 같은 독일사상가에 의해, 그리고 발(J. Wahl)과 마르셀(G. Marcel) 같은 프랑스 사상가에 의해 발견된 후, 키에르케고르는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높이 추켜올려졌다.


루터처럼 교회에 논쟁을 거는 사람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와 키에르케고르의 기러기

당대의 교회에 맞선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출처 : Wikipedia>

임종을 앞두고 있는 키에르케고르를 그의 오랜 벗이었던 목사 한 사람이 찾아와 교회의 형식대로 교의 문답을 했다. 그 자리에서 키에르케고르는 교회에 의한 종교 예식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주권자시라는 것은 확실해. 그러나 후에 인간들이 나타나서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것들을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정비하려고 했어. ……그렇게 해서 목사들이 주권자가 되는 거야.” 기존의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기 때문에 그것은 마땅히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키에르케고르의 생각이었다. “확실히 모든 일이 개혁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서운 개혁이 될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루터의 종교 개혁 따위는 거의 농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저 구절들이 알려주듯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의 종교적 분위기 안에서 골치 아픈 논쟁가이자 고립된 존재였다. 이러한 키에르케고르의 입장을 잘 알려주는 것이, 안데르센의 자전적 동화 [미운 오리새끼]를 거꾸로 뒤집어놓은 것 같은, [기러기]라는 우화적인 글이다. 안데르센과 키에르케고르는 동시대인이자 비판을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재미있게도 키에르케고르의 첫 번째 책은 안데르센에 대한 혹독한 문학비평서인 [아직도 살아있는 자의 수기(1838)]이다. 어쨌든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가 오리들 틈에서 돋보이는 백조가 되는 반면, 키에르케고르의 [기러기]에선 날 수 있는 기러기가 날지 못하는 거위들을 날게 해주려고 돕다가 결국은 공상적 바보라는 비난을 거위들에게 듣는다. 이런 비난 앞에 기러기는 의기소침해져 날지 못하는 거위처럼 돼 버린다.

당대의 국교회는 거위이고 키에르케고르는 기러기라고 해야 할까? “거위는 절대 기러기가 될 수 없으나 기러기는 곧잘 거위가 돼 버린다. 경계하라!” 당대의 교회와 맞선 키에르케고르의 책들은 바로 거위가 되지 않으려는 저 경계의 표현이었다.


실존과 불안 독창적인 실존 철학을 수립하다

이렇게 무엇보다도 키에르케고르는 교회 비판을 수행하는 종교사상가였다. 그러나 그가 신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입장을 수립하면서 남긴 사상은 종교적인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 실존철학의 한 독창적인 입장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키에르케고르의 여러 중요한 개념들 가운데 두 가지를 꼽자면 바로 ‘실존’과 ‘불안’일 것이다. 실존이란 자유로운 개인을 기술하는 개념으로서, 실존한다는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서 자신을 실현하는 것을 일컫는다(‘이것이냐, 저것이냐’는 키에르케고르의 저작 제목이기도 하다). 헤겔에서와 달리 이것과 저것의 변증법적 종합 같은 것은 없으며, 하나는 선택하고 하나는 거절해야 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저작 ‘이것이냐, 저것이냐’ 
<출처 : Wikipedia>

이런 실존적 선택을 해야 하는 인간의 근본적 기분이 ‘불안’이다. 실존주의하면 불안이 떠오를 정도로 불안이라는 이 기분은 유명하다. 실존함의 진리는 논리적 진리나 일상적인 경험적 사실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실존적 진리에는, 널리 일반화된, 인식의 두 원천인 생각함(노에시스)과 감각적 경험(아이스테시스)을 통해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으며 제3의 길이 필요하다. 이 제3의 길이 기분, 그 가운데서도 특히 불안이다. 불안은 실존주의자들이 실존적 진리에 접근하기 위한 통로로서 자의적으로 고안한 발명품이 결코 아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40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의 저작에서 이미 불안이라는 정서가 존재론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들어왔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 현상의 분석에 가장 깊이 파고들어간 사람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불안이란 어떤 것인가?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아담을 예로 들어 보자. 아담은 금단의 과일을 먹으면 선악을 분별하게 되며 동시에 죽는다는 금지의 법과 경고를 신에게서 받는다. 이 금지의 법 속에서 아담은 자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금지의 법을 어기면 죽게 되지만, 어쨌든 나는 어길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가능성의 발견 말이다. 이것이 ‘바로 나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라는 불안한 가능성이다. 후에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선택이란 어떤 법적, 도덕적 심금도 아니라 오로지 자유로운 의식에게 달려있으며, 이 사실에 관한 정서가 불안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키에르케고르를 계승한다.


실존적 인간의 3단계 돈 후안, 소크라테스, 아브라함

이러한 실존적 인간이 선택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길을 그린 것이 바로 ‘3단계설’이다. 첫째는 감성적 단계이다. 이 단계에 있는 인간은 감성을 통해 직접 주어지는 것들, 즉 감각이나 충동이나 감성에 지배된다.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충동에 따라 살 때 알 수 있듯이 반성 없는 즉각적인 삶이며, 따라서 어떤 선택도 없다. 선택 대신 감각적인 것들의 지배가 있을 뿐이다. 선택이 없으므로 선택이 불러올 삶의 질적 도약 역시 없다. 이 단계를 상징하는 인물은 감각적 충동의 화신이라 할만한 ‘돈 후안’이다.

다음 단계가 윤리적 단계이다. 도덕적 의무 등을 받아들이고 보편적 이성의 법칙에 따르는 삶이 이 두 번째 단계의 삶이다. 이 단계의 상징은 이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했던 ‘소크라테스’가 될 것이다. 이성에 입각한 보편적 법에 따라 사는 것으로 이 단계는 요약된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단계는 신과 관계하는 삶, 즉 신앙의 세계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가 바로 신앙적 삶이다. 신과 관계하는 것은 어떤 삶이며, 이는 왜 이성의 보편적 법칙에 따르는 두 번째 단계와는 다른 것인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이 이 세 번째 단계의 상징이다. 이성에 입각한 보편적 법칙, 즉 세속적인 합리적 법의 차원(두 번째 단계)에서 보자면, 아브라함은 그저 아들을 살해하려는 지탄받아야 하는 자일뿐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말한다. “윤리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신과 단독으로 대면하는 절대적 관계에 비하면 말이다. ‘신과 마주하는 단독자(den Enkelte)’가 이 세 번째 단계의 삶이다.


이성보다 상위에 있는 것 절대적인 것을 찾아서

이 세 번째 단계는 두 번째 단계, 즉 우리의 현실적 삶을 보호하는 보편적 이성에 입각한 법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단계와 세 번째 단계, 소크라테스와 아브라함, ‘아테네의 철학’과 ‘예루살렘의 신앙’ 사이의 관계에서 두 가지 사안을 읽어내야 할 것이다. 신앙은 이성의 법칙과 타협하지 않고 절대적이라는 것, 이성이 세운 법칙은 그 자체만으로 충족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심층적으로 절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반성되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

덴마크의 종교적 분위기 안에서 골치 아픈 논쟁가이자 고립된 존재였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무덤, 그러나 진짜 그의 시신이 묻힌 곳은 모른다. <출처: en.wikipedia.org>

키에르케고르의 이 3단계설은 어떤 철학적 의미를 가질까? 무엇보다도 키에르케고르 같은 신앙인이 아닌 사유하는 자들에게?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단지 신앙인의 열광으로만 취급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믿고 또 보편적 이성의 산물이라 여기고 복종하는 ‘법의 기원’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 홉스가 보듯 인간은 본성상 이기적이고 이기심을 만족시키자니 ‘만인 대 만인’의 투쟁 관계 속에 들어가고 따라서 서로 어쩔 수 없이 타협해서 법은 세워지는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잠재적으로 전쟁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합리적 법의 배후에는 합리적 계산을 초월하는 어떤 것, 절대적 선에 대한 복종 같은 것이 있고 이 선의 구현을 위한 도구가 합리성 아닌가?

서구합리주의에 대한 주요 반발자 가운데 하나인 키에르케고르는 아마도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합리적 법의 배후에서 법을 인도하는 절대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이고 사랑인가? 아니면 이성의 계산적 능력만으로 법은 수립될 수 있는가?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늘 법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런 물음들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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