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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인문사회

철학과 관상 - 인간의 운명은 행위에 달려있다

by 내오랜꿈 2010.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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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는 관상도 보나? 

인간의 운명은 행위에 달려있다


출처:네이버 캐스터(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88&contents_id=1939)

일시:2010. 02. 01

글:서동욱



철학과 학생은 소개팅을 나가 곤욕을 치른다. 눈을 깜박이며 여학생이 묻는다. “어머 철학과야? 그럼 관상 좀 봐줘. 손금은 어때? 내 머리통은 똘똘하게 생겼어?” 그러면 어떤 학생은 “철학과에선 그런 거 안 배우거든!?”이라고 소리치며 자기 학문의 영예를 지키겠답시고 여자를 뒤로 한 채 표표히 걸어 나가고, 반대로 어떤 학생은 아름다운 말로 관상을 보며 상대방의 환심을 살 절호의 기회를 잡는다. “누님은 코가 아주 넓고 귀하게 생겼어요, 귀는 부처님처럼 축 늘어졌고요……흠, 좋아요, 좋아.” 철학자는 철학관 도사처럼 될 수 있는 것일까?

철학과 학생은 관상을 볼 줄 안다?
과연 얼굴은 운명을 맞추는 문서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관상학골상학, 그리고 이에 인접한 또 하나의 강력한 기호 해석인 점보기에 열광한다. 설을 전후로 한요즘 같은 시기엔 특히 그렇다. 관상학과 관련된 참으로 혹독한 피해자이자 가장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단연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위연()일 것이다. “위연은 반골()의 상입니다. 중용하지 마십시오.” 널리 알려진 대로 위연이 유비를 찾아왔을 때 제갈량은 이렇게 권유했다. 그리고 [삼국지연의]는 제갈량의 예언을 따라 마지막까지 위연을 괴롭힌다. 진짜 반골의 골상대로 배신하고서 최후를 맞는 인물로 위연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위연은 골상학적으로 반골이고, 그런 두개골의 생김새 때문에 배신자의 운명을 타고 났으며 뼈 속에 새겨진 저 운명에 맞추어 자신의 인생을 살아나간 것인가? 배신자라는 저주받은 묘비 하나를 얻을 운명은 정말 그의 두개골 속에 새겨져 있었던가? 어쨌든 관상학 또는 골상학은 이렇게 외면적 생김새로부터 사람의 내면이 지닌 본질을 읽어내는 기술이다. 칸트가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이란 책에서 정의했듯 말이다. “관상학은 사람의 외면으로부터 그의 내면을, 그것이 성향이든 심술이든, 판정하는 기술이다.”

외적 징후를 통해 사람의 운명을 파악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전문적인 관상학자가 아니어도 사람들은 사실 이런 관상학의 취향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 듯하다. 사람의 외면을 보고 그의 내적 본질을 판정하는 성향 말이다. 이런 예를 보자. 1980년대 중반에 엄청난 베스트셀러로 성공을 거두었던 소설 가운데, 정비석의 [손자병법]이 있다. 춘추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와신상담()이란 고사의 주인공인 월나라 구천()이 20년 가까이 쓰디쓴 쓸개 맛을 보며 오나라 부차()에게 복수를 준비한 후 마침내 책략가 범려()의 도움으로 승리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승리를 얻은 구천이 그간 도움을 준 범려를 소홀히 하자 그는 이렇게 구천의 관상을 본다. “범려는 관상학적 견지에서 구천의 얼굴을 새삼스러이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심 크게 놀랐다. 왜냐하면, 구천은 목이 길게 패어 있는데다가 입은 새 주둥이처럼 삐죽 나와 있는 ‘장경조훼형()’이었기 때문이었다. 관상학으로는, 목이 길고 입이 새 주둥이 같이 생긴 사람은 ‘환난()은 같이할 수 있어도, 환락()은 같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전해 오지 않던가.” 그 길로 범려는 구천에게서 도망칠 마음을 먹는다. 소설이 기록하고 있는 이 관상보기는 정사()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타인과 자신과의 관계를 ‘이성을 통해 확정하기 어려울 때’ 사람들이 종종 관상보기를 통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습성을 가지고 있음을 잘 예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관상학은 일종의, 외적 징후를 통해 사람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밖의 모습과 다르게 나타나는 내면
헤겔, 관상학자의 따귀를 때리고 골상학자의 머리를 부수다

동양인들 뿐 아니라 서양인들도 이런 관상학과 골상학에 매우 매료되어 왔다. 19세기의 헤겔은 그의 [정신현상학]에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풋내기 골상학은 교활한 사람은 주먹만한 혹이 귀 뒤편에 붙어 있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아내는 그녀 자신이 아니라 남편의 이마에 혹이 달려 있다고까지 할 정도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외적으로 드러나 있는 징표들에 몰입해서 인간의 비밀을 캐내려 하는 것이다. 18세기 영국의 유명한 배우 제임스 퀸은 누군가의 관상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관상학에 관한 사람들의 맹신적인 신봉을 대표하는 구절로 읽을 수 있다. “이 남자가 불한당이 아니라면, 창조주는 읽을 수 있는 필적으로 글자를 쓰고 있지 않다.” 험악한 표정의 남자가 불한당의 내면을 갖고 있지 않다면, 창조주는 자연을 명확한 문자로 쓴 것이 아니라 혼란된 문자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험악한 얼굴이라는 문자에 험악한 마음이라는 내용이 대응하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 누군가 당신의 외관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당신의 내면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프랑스의 화가 샤를 르 브렁이 그린 소와 인간의 얼굴, 관상에 대한 스케치.

누군가 당신 관상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치자. “자네는 정직한 사람인 양 처신은 하지만 사실은 억지로 그러는 척할 뿐, 본심은 악한()이라는 것이 자네 얼굴에 드러나 있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다음과 같이 행동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적어도 사나이답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당장에 세상을 날려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그의 따귀를 후려칠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응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밖에 없으니, 참으로 이렇게 대응하는 것만이 ‘인간의 현실성은 그의 얼굴에서 드러난다’는 생각을 학문의 으뜸가는 전제로 내세우는 데 대한 반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현실적 됨됨이를 얼굴에서 찾는 자의 따귀를 날린 헤겔은 이번엔 골상학자를 찾아간다. 골상학자는 대체로 뭐라고 말하는 사람인가? “만약 어떤 사람에게 ‘너의 두개골은 이렇게 생겼으므로 너의 내면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한다면 이는 곧 두개골이 너라는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렇게 말하는 골상학자에게 헤겔은 다음과 같이 응수해 주자고 제안한다. “골상학을 주장하는 상대방의 뇌를 박살낼 정도의 타격을 가함으로써 뼈라는 것이 인간에게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하물며 그것이 인간의 실상을 진실로 나타내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그 당사자의 지능에 어울릴 정도로나마 받아들이게 하는 길밖에 없다.” 당사자의 지능에 어울리게, 바로 그의 머리를 때리고 박살내서 골상학의 허무함을 깨닫게 해주자는 것이다. 이유는 매우 간단한데, 내면은 밖으로 드러나 있는 모습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본질은 행위의 결과 속에 존재
인간의 운명은 의지와 행위를 통해 개척되는 것

이렇게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관상학자의 따귀를 때리고 골상학자의 머리를 부수는 책이다. 철학이 이렇게 과격해도 좋은가?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실 [정신현상학]이라는 저 유명한 책은 많은 부분 추상적이기도 하지만, 따귀를 때리고 머리를 부수는, 저자 거리에서나 벌어질 법한 인간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행위’가 지니는 의미를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관상이나 골상을 보며 운명을 읽어내는 이의 따귀와 머리를 때려주자는 ‘구체적 행위’에 대한 저 제안은 과격한 대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는데, 바로 인간의 본질은 ‘행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과 운명은 미리 마련되어 있고 얼굴을 관조하는 관상학을 통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개인의 본질은 오히려 의지나 행위의 결과 속에 담겨 있게 된다.” 이것이 헤겔이 관상학을 비판하며 내놓는 결론이다.

인간의 운명은 의지와 행위를 통해 개척되고 바뀌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인간의 운명은 의지와 행위를 통해 개척되는 것이지, 관상이나 골상이나 별자리나 사주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얼굴이나 손금이 살아가면서 변한다고 하는, 우리가 종종 듣는 견해는 바로 인간은 정해진 운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완성해 나간다는 이런 진리를 얼마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정이 이렇다면, 즉 우리의 운명은 오로지 우리가 지금 해나가는 행위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왜 덧없이 관상을 보고 점을 치면서, 정해진 우리의 운명을 엿보려고 하는 것일까? 바로 ‘공포’ 때문이다.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에서 점쟁이를 비판하며 알렉산더를 예로 들었을 때 그는 이 점을 잘 꿰뚫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수사에서 결과를 알 수 없는 전투를 앞두고 공포에 빠진 알렉산더는 점쟁이를 내세워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리우스에게 승리하여 공포가 사라진 후엔 점쟁이를 찾지 않았다.

행위가 운명을 만들어가야 할 시점에, 공포가 발목을 붙잡고서 미리 정해진 운명이 있지 않은지 찾아볼 것을 권하는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이 정도는 이야기 해야겠다. 결혼 못한 딸들이여. 엄마가 데려온 점쟁이가 네 남자의 관상이 나쁘다고 혼인을 반대하면 그를 헤겔이 제안한 행위 지침에 따라 대하라. 취직 못한 아들들이여. 네가 면접에서 떨어진 이유가 혹시 관상이 나빠서였다면 그 회사를 코웃음 쳐라. 한 인간의 운명은 머리 한 군데의 평평한 공터에 모여 있는 눈, 코, 입, 귀의 생김새, 그리고 머리통의 모양이 결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타고난 운명의 행운 때문에 황제가 되고 부자가 되고 출세를 하며 좋은 짝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운명은 오로지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그의 행위 속에서만 확인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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