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1) - 구례에서 장터목까지
등산코스 : 백무동 -->장터목 --> 천왕봉 --> 장터목 --> 백무동
길이 : 15KM
소요시간 : 8시간 30분
개천절을 낀 지난 주말, 그야말로 황금 연휴다.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다. 명동과 동대문, 제주도는 '유커'들로 넘쳐나고 부산은 국제영화제로 붐비고 전국의 주요 지자체는 저마다의 축제를 개최하느라 정신 없다. 이런 날에 길을 나섰으니 고생하는 게 당연한 것. 우리야 워낙에 한적한 촌동네에 살다 보니 차 막힐 일 없지만 동행하기로 한 팀들은 서울과 부산에서 오는지라 이래저래 고생인 모양이다. 1시에 만나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약속은 물 건너가고 3시가 넘어서야 겨우 모두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애초의 계획은 점심을 먹고 성삼재로 가서 차를 두고 노고단까지 걸어갔다가 오는 것. 천왕봉은 둘쨋날에 가기로 했기에 첫날은 가볍게 산책 정도만 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계획대로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성삼재를 넘어 백무동으로 바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날이 날인지자 성삼재 넘어가는 길 또한 만만찮다. 시암재를 지나고부터 길 한편으로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게 영 불안하더니만 성삼재 근처부터는 길 양편으로 주차된 차들 때문에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공간만이 남아 있다. 여기를 올라가는 차와 내려가는 차가 맞부딪치니 교통체증이 안 일어날 수가 없다. 20여 분을 지체한 끝에 겨우 올라선 성삼재 휴게소. 차들로 넘쳐난다. 눈으로만 멀리 노고단의 모습을 간직한 채 서둘러 백무동으로 가는 길. 바쁜 우리의 마음을 모르는 차들을 추월해가며 백무동에 도착하니 5시가 가까워온다.
짐을 내리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빈 자리가 없다. 우리처럼 등반을 위한 야영도 있지만 오토캠핑장에 가는 게 어울리는 팀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마치 집안의 살림살이를 다 옮겨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온갖 캠핑장비들이 넘쳐난다. 우리 일행은 그야말로 야영을 위한 최소한의 장비만 있는 까닭에 텐트 설치와 짐을 정리하는 것도 10여 분만에 간단하게 끝이 났다. 특별히 달리 할 일도 있는 게 아니니 바로 밥먹자며 저녁 준비를 시작한다.
이 팀들과는 재작년에 소백산 눈꽃 산행, 올해 초의 무등산 산행을 같이 했었다. 겨울 소백산의 그 모진 칼바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오를 수 있는, 어떤 곳에도 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대학 후배들인데 입학하면서 알게 되었으니 만난 지가 25년이 된 친구들이다. 내일 천왕봉까지 올라가야 하니 가볍게 한 잔 하자며 삼겹살과 소주로 시작한 저녁이 한밤중까지 이어진다. 이런 자리에서는 늘, 마지막 한 병이 문제다. 그걸 안 따고 참아야 하는데 이 밤도 다 비우지 못할 병을 기어이 따고 말았다. 누군가는 내일 고생하게 생겼다. 그 누군가가 대부분 내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ㅠㅠ
6시부터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고 부산하게 움직였는데도 8시가 넘어서야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의 키포인트는 아무래도 저 부자지간이 될 거 같다. 천안의 어느 대학 교수로 있는 후배의 큰 아들인데 9살이다. 서울에서 관악산이나 도봉산 등에 데리고 다녀보니 크게 문제가 될 건 없겠다 싶어서 데려왔다고 한다. 다만 얇은 침낭으로 인해 간밤에 텐트 속에서 떨고 잤다고 한다.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산속에서의 하룻밤은 준비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악몽이다.
백무동에서 장터목으로 오르는 길. 꽤나 가파른 길에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했던 80년대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백무동 계곡길은 잘 닦인 도로 같아 보인다. 주변에 흩어진 돌들로 조각 맞추듯 등산로를 잘 정비해 놓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배낭을 벗어던지고 드러눕고 싶은 생각뿐이다. 머리는 아프고 속은 안 좋고 발은 떨어지지 않는다. 지난 밤의 술이 문제인 것. 계곡을 벗어나 능선길에 오른 뒤에는 물들어가기 시작한 단풍과 눈 앞을 스쳐지나는 구름도 손 뻗으면 잡힐 만큼 가까이 있건만 즐길 여유가 없다.
그렇게 아무런 생각없이 3시간 여를 걸어서 다다른 장터목 대피소. 그제서야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고 물들기 시작한 단풍들도 눈에 들어온다. 아직 12시가 안 되었는데도 취사장 안은 이미 점심을 먹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운 좋게 데크를 하나 잡고 앉았다. 천왕봉을 갔다 와서 점심을 먹을까 먹고 갈까를 잠시 고민하다가 갔다 오면 너무 늦을 거 같아서 라면을 끓여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주변을 돌아보니 무슨 공사를 하는지 포크레인까지 동원되어서 몹시 소란스럽다. 거의 20년 만에 보는 장터목 산장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다. 그동안 지리산을 몇 번 왔었지만 노고단이나 세석, 삼신봉 등에만 올라갔다 바로 내려가는 바람에 천왕봉 근처에는 올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삼십대 초반의 젊은 청년은 이미 흐르는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오십이 되어서야 사라진 시간을 끼워맞춰 보고자 하나 찾을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