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모습/일상

특별할 것 없는 결혼기념일 파티

내오랜꿈 2018. 4. 1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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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을 다녀와 시골집으로 간 날. 5남매를 키워낸 과수원에서는 하얀 꽃잎이 춤을 추듯 미풍에 하늘거리고 꿀을 찾아 모여든 벌들의 윙윙거리는 소리는 여름날 애타게 짝을 찾는 매미 울음소리처럼 요란했다. 눈, 귀를 압도하는 이 심포니가 어느 누구에겐들 황홀하지 않을까만 어릴 때부터 어느 정도는 일상이 돼버린 나보다는 삼십여 년 남짓한 자신의 생애에서 이런 풍경을 처음 접했던 옆지기의 기억이 지금까지도 훨씬 더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 같다.


오남매를 키워낸 배 과수원


그런데 이건 뭐 그냥 전초전일 뿐.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이랬던가. 별빛 초롱이는 달밤. 하얀 꽃송이를 감싸듯 꽃 무더기 사이로 돋아나는 연두색 새순들과 어우러진 드넓은 배밭 풍경은 나에게도 일상일 수는 없었던 광경이기에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해야 할 '일지춘심'도, '다정'도 없었던 터라 슬피 우는 자규 소리 없었음에도 마냥 황홀했던 어느 봄밤의 추억. 디지털 기기가 부족했던 시절이라 봄날의 배밭 풍경을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는 게 아쉽다면 아쉬움일 터.


흐드러지게 핀 배꽃과 함께 따라다니는 기억은 엄나무 순이다. 배꽃이 바람에 날려 한 장 두 장 떨어지다 우수수 하얀 꽃비를 쏟을 즈음이면 과수원 울타리 역할을 하던 엄나무 새순은 어느새 한 뼘 크기로 자라 있다. 길어야 일 년에 사오 일. 때를 놓치면 한순간에 새순은 목질화가 진행되어 먹기 힘들어진다. 하루라도 더 키워 무게를 널려 오일장에 내다팔려는 노모와 적당한 때 따서 식구들 맛있게 먹자는 자식들 사이의 실랑이는 얼마 전까지 해마다 되새김질되는 에피소드 한 자락 정도랄까. 이제 더는 그럴 일도 없겠지만.



집 뒤 텃밭 가장자리에서 이십여 일 갓난아기 조막손처럼 오므리고 있던 엄나무순이 이번 주에 들어와 활짝 피어나고 있다. 달밤에 어우러질 배밭 풍경은 없지만 엄나무순 하나 만으로도 잊고 지내던 결혼기념일을 생각나게 만든다. 특별한 이벤트는 아니어도 퇴근길, 한적하고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저녁이나 먹을까 계획했는데 한나절 사이에 옆지기 마음이 변했다. 뜯어놓은 봄나물, 봄햇순도 많은데 뭔 외식이냐며 괜찮은 와인이나 한 병 사 집에 가서 먹잔다. 나야 뭐 돈 굳었으니 싫을 리가.....


부드러운 목살 몇 점 구워 준비한 결혼기념일 저녁상. 온통 봄나물 파티다. 지난 주부터 먹고 있는 미나리, 머위, 방풍나물, 양배추, 민들레김치에다 두릅과 엄나무순, 당귀잎이 더해졌다. 여기에 무슨 와인일까 싶지만 뭐 어떠랴. 평양 한 번 갔다 오니 자칭 냉면 마니아들의 '면스플레인'도 엉터리임이 판명난 지금, 파스타에 와인이든 삼겹살에 와인이든 개인의 취향에 불과할 터. 칠레산 멜롯의 묵직한 깔끔함이 채소와 고기의 균형을 잡아준다.


엄나무순

두릅순

결혼기념일 파티에 초대된 봄나물, 봄햇순들.


일 년 만에 맛보는 엄나무순의 쌉싸름하면서도 달큰한 향이 모든 맛을 압도한다. 그래서 엄나무순은 사람들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하지만 나에겐 밋밋한 두릅 따위와는 결코 비교하고 싶지 않은, 오랜 기다림의 맛이다. 20년의 기억도 한순간에 불러오는 추억의 맛.


이렇게,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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