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익는 소리 - 진달래꽃, 취나물, 고사리...
한적한 남도 바닷가 이른 봄날은 온도계에 표시되는 기온만큼 따뜻하지 않다. 맑은 햇살도 대개는 거친 숨결 내뿜는 바람을 동반하기 때문. 그래도 10여 일 전부터 파종한 잎채소는 모두 싹이 났고, 콩 종류와 당근, 생강 같은 뿌리식물도 파종을 끝냈다. 그러는 사이 담벼락 아래 가시오갈피나무 새순이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가시오갈피 새순을 보니 자연스레 뒷산의 엄나무순이 궁금해졌다. 이 가시오갈피 새순이 활짝 피고 일주일 뒤면 집 뒷산의 엄나무순이 먹기 좋을 만큼 적당하게 피어오르기에.
▲ 가시오갈피나무 새순
▲ 취나물
▲고사리
모처럼 낮기온이 20도 가까운 화창한 날, 궁금함을 못 견뎌 뒷산에 올랐다. 산기슭으로 다가서자 가장 먼저 반기는 건 취나물이다. 어느새 이만큼 자랐나 싶을 정도다. 오솔길 사이 양지바른 곳에선 고사리도 피었다. 올해 봄날은 작년보다 추운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얘네들은 '무슨 소리~' 하는 듯하다. 이미 봄은 한창 익어가고 있었다.
▲ 활짝 핀 진달래꽃
소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진 그늘을 벗어나 햇살 가득 모아지는 오목한 중턱에 이르니 이런저런 잡목들 사이로 분홍빛 진달래꽃이 활짝 피어 있다. 얼마 전부터 멀리서나마 울긋불긋한 산 중턱을 보면서 진달래가 피었거니 했는데 코앞에서 꽃향기를 맡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아렴풋하다. 꽃잎 따먹으며 뛰놀던 유년의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가슴 저미도록 향수 어린 꽃일 수도 있는데 누군가에겐 늘 그 자리에 피어 있는 잡목일 뿐이다. 대상에 대한 가치판단은 늘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세계 속에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세계에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으니 세계는 어떤 목적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에 대해 가치판단이나 윤리적 해석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우리는 자주 어떤 사물에 대해 아름답다, 숭고하다 등의 가치판단을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일 뿐이지 그 대상에 대한 가치를 뜻하는 건 아니다.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앞에 두고 삶의 가치를 찾으려 철학이라는 학문 전체를 걸고 고뇌하던 한 천재철학자의 마지막 문장,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표현은 그래서 늘 아프게 다가온다. 철학의 이유를 찾고자 삶의 가치를 찾고자 사고의 극한까지 나아갔으나 끝내 찾지 못한 자의 절망이 배어 있는 듯해서 그렇다. 그럼에도 난 길가에 핀 유채꽃 한송이를 보고서도 '와, 아름답다'고 한순간 감탄하고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삶을 살고 있다.
▲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엄나무순.
▲ 대를 세우는 쑥
▲ 유채꽃 꽃망울
진달래꽃 군락지 사이로 엄나무 햇순이 필 준비를 하고 있다. 자연의 시간은 아무런 가치도 개입되어 있지 않지만 늘 이렇듯 한결같다. 일주일 뒤에 오면 진달래꽃은 거의 다 떨어지고 엄나무 순은 활짝 피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목적도 개입되어 있지 않고 가치도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것은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이제 쑥은 대를 세우려 하고 유채는 꽃망울을 잔뜩 품고 있다. 다음 주부터 토마토를 비롯해 고추, 파프리카 등을 옮겨 심고 나면 올해 봄파종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다.
이미 봄은 한창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