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유/산 · 트레킹

낙안읍성, 금전산

내오랜꿈 2009. 8. 2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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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리적으로 흘러야 할 일상이지만, 유독 심하게 앓았던 '일상 탈출'의 바람 때문이었는지, 개인적으로는 근 10년만에 산에 오를 생각에 내심 설레었던 주말이다. 계획하고 있던 일정이었음에도 때 없이 도사리고 있던 복병은 부산에서 충동적으로 날아든 한 무리의 친구들과 그 가족이었다. 다수가 설왕설래 하는 가운데 여수에서 근거리인 '지리산 피아골의 단풍 - 제암산 갈대숲 - 만만한 광양의 백운산'을 거쳐 결국 최종 목적지로 천년고찰 송광사와 선암사를 함께 품고 있는 조계산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승주IC를 빠져 나와 선암사 들어가는 2차선 도로의 초입을 지나니 얼핏 단풍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플랭카드가 보인다. 일말의 불안감을 안고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좁은 도로에 차량 행렬이 긴 꼬리를 물고 있었다. 한참 가다서다를 반복하던 중 선두의 남편이 운전대를 나에게 맡기고 주차장 상황을 살피러 간 사이, 주목받지 못한 잎 진 감나무 가로수에 올망졸망 달린 유난스레 작은 감들이 생뚱맞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다 수원에서부터 신고 온 새 등산화까지 생뚱맞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마저 일었다. 결국 예상대로 주차장까지 다녀온 남편의 가위표 손짓에 차를 돌렸고, 아이들을 이끌고 산행후 낙안읍성에서 합류하기로 한 팀을 따라 호수를 끼고 도는데, 산빛 물빛이 너무 고와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이 자꾸만 건들거린다. 


막상 낙안읍성 주차장에 이르니, 등산에의 미련을 못 버린 일행은 일제히 산이름도 모른 채 바위들이 올망졸망 박혀 있고 그리 험해 보이지 않는 뒷산을 올려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남편은 이미 산행을 포기하여 옷과 신발을 평상복으로 갈아 입은 후였지만, 일행의 성화로 다시 채비를 서둘렀다. 




낙안온천 앞에 주차를 하고 등산로 입구를 찾아 신발끈을 재차 고쳐 묶으며 뗀 첫걸음이 사뭇 활기차다. 아침부터 우왕좌왕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무렵이었고, 남들 하산 할 즈음 오른 길이지만 따스한 날씨는 가벼운 옷차림에도 금방 몸에 땀이 배였다. 당당히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건강함이 새삼 감사한 순간이다. 


예전에 엄청 폼 재고 다녔던 이력을 살려, 산 중턱까지는 일정한 폭으로 바삐 가는 남자들의 보무를 잘 맞추었지만 그기까지였다. 숨가쁨의 강도가 심해짐에 따라 걸음이 차츰 느려지니, 어느 순간 앞서 가던 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일행 중 뒤처져 오는 부부가 있었으니 부끄러운 수준은 아니어서 다행스럽지만 갈수록 힘겹다. 자연스레 몸이 낮춰지며 땅만 보고 걷게 되고, 발끝으로 하산하는 사람들의 인기척을 느끼며, 성큼 앞서간 남편에게 같은 페이스를 기대하는 건 어쩌면 앞으로도 요원한 일이란 생각을 했다. 




이왕 뒤처진 걸음 위아래를 살피기 시작한다. 정상 가까이 병풍 같은 벼랑을 올려다 보는 재미가 나쁘지 않았고, 발 아래에는 옹기종기 낙안읍성의 초가들과 낙안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혼자 가는 내가 다소 안스러웠던지 하산하던 남자분이 귤 두 개와 오이 하나가 든 봉지를 손에 들려준다. 고맙기도 하지...




경사각이 있는 소나무숲 길을 따라 얼마간 오르니,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 막았다. 이곳이 극락으로 가는 관문이기라도 하듯 머리를 낮추고 이 문을 통과하니, 제법 운치 있는 좁은 돌계단 길이다. 흠씬 땀을 흘리고 난 후라 시원한 바람에 현기증을 느끼며 아슬하게 걸음을 옮겼더니, 작은 산장 같은 느낌의 절집이 나타났다. 바로 '금강암' 이다. 부처님께 인사 드리는 것보다 일행을 찾는 게 급하여, 왼편 바위를 살짝 돌았더니 확 트인 시야가 옹골차다. 




자연석불인 줄도 모르고(?) 바위에 기댄 남편의 '고생했다'란 인사를 받으며, 땀도 식히고 자랑겸 손에 쥔 봉다리를 풀려는 찰나, 작대기를 들고 나타나신 스님. 그의 첫 마디가 불경스럽게도 금지구역에 들어간 남편에게 하는 꾸지람이다. 암자에 혼자 기거하시는 진성스님은 대화가 깊어질수록 겉모습과는 다르게 스님 같지 않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대구 파계사에 적을 두시다가 이곳에 온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단다. 불청객인 우리 일행에 대한 몇 가지의 질문과 이 산 주변 정세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더불어 선암사와의 불편한 관계를 풀어내신다. 




간밤에 보성의 대한다원 제2농장의 매점에서 구입한 녹차 막걸리 한 통을 얼려서 베낭에 넣고 왔는데, 이 또한 부지런한 남편 덕이다. 안주로는 아침에 해장국을 먹으며 덜어 온 김치 조각. 혹시나 하여 스님께 잔을 권했더니,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면 서운했을 만큼 시원하게 목을 축이신다.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등산객이 단감을 가지고 와서 막걸리 한 잔을 청했다. 땀 흘리고 난 후 소 잔등 같이 부드러운 주변 산들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들이키는 한 잔 막걸리의 맛을 음미하니, 신선이 따로 없다. 


스님과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을 잊고 있었지만 하산해야 할 시간이다. 이런 우리들에게 스님은 라면을 끓여줄테니 먹고 가라고 몇 번을 재촉하신다.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애써 자리를 터니 제법 아쉽다. 금강암까지 다시 걸어나오며, 목이라도 축이고 가라는 스님의 말씀을 따라서 좁은 마당에 들어서니, 물이 귀하여 반나절을 받았다는 흰 생수통이 놓여 있다. '아, 스님! 저 바위 아무리 봐도 석불 같지 않은데...' 란 의문을 전하니 다시 가서 자세히 보라고 한다. 이조차 다음을 기약하며 하산을 서두른다. 오를 때와는 달리 달리 하산하는 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written date:2005/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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