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들의 열광 끌어낸 재발매 앨범
[세상을 바꾼 노래]⑧ 프랭크 시나트라의 〈올 오어 너싱 앳 올〉(1939년)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30일
Frank Sinatra "All or Nothing at All"
|
자본주의의 가장 첨예한 전선인 미국에서는 예술분야 종사자들도 노조활동을 통한 이윤추구에 적극적이다. 최근 미국작가노조의 파업이 그 단적인 예다. 음악계라고 다르지 않다. ‘미국음악가연맹’은 1896년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두 차례의 대대적인 파업을 감행한 바 있다. 1942년 8월부터 1943년 말(일부 레코드회사와는 1944년)까지 이어진 1차와 1948년의 2차 파업이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노조위원장 제임스 페트릴로가 매번 파업을 주도했고, 그때마다 노조 소속 음악가들의 연주 활동을 전면 금지했다. 그 때문에 음악가 노조의 파업은 이른바 ‘페트릴로 금지령’이라 불린다.
1차 ‘페트릴로 금지령’은 음반판매량의 증가가 레코드회사와 라디오 방송국의 배만 불린다는 주장에서 시작하였다. 공연활동의 기회와 방송에서의 라이브 연주가 줄어들면서 연주인들의 기회가 제한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파업의 여파로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새로운 음반제작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기출시작의 재발매가 속출했고 악기 연주자가 필요없는 아카펠라 음악이 유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레코드회사들의 궁여지책에서 비롯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또다른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요컨대, 프랭크 시나트라의 경우가 그렇다. 1943년 당시 프랭크 시나트라(1915~1998)는 메이저회사인 컬럼비아와 계약을 맺으면서 스타덤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가노조의 파업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몸이 단 시나트라와 컬럼비아는 고심 끝에 기존 음반이라도 재발매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시나트라가 해리 제임스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1939년 발표했던 〈올 오어 너싱 앳 올〉이다. 처음 발표했을 당시 유명 라이브클럽(빅토르 위고 카페)의 매니저로부터 “파리 한 마리의 관심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혹평을 받기까지 했던 곡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이 앞섰다.
인생이 흥미로운 것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939년 녹음을 손끝 하나 대지 않고 고스란히 재발매한 〈올 오어 너싱 앳 올〉은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대히트를 기록했다. 경쟁상대가 많지 않았다는 정황적 요인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시나트라의 개인적 매력이 새로운 세대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더욱 주효했다. 평이한 스탠더드 팝 스타일의 〈올 오어 너싱 앳 올〉은 시나트라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통해 좀더 로맨틱한 경지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힘입어 프랭크 시나트라는 소녀 팬들의 폭동에 가까운 열광을 끌어낸 최초의 스타로 등극했던 것이다.
〈올 오어 너싱 앳 올〉은 프랭크 시나트라의 전성시대 개막을 알린 ‘슬리퍼 히트’(예상치 않은 성공작)였다. 더불어 “사랑에 관한 한, 모든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는 노랫말은 악명 높은 바람둥이로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개인사를 예견한 것이기도 했다. ‘세기의 목소리’로 불린 ‘20세기 최고의 엔터테이너’의 화려한 경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스크랩 > 문화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즐링 주식회사(The Darjeeling Limited)’ (0) | 2007.12.03 |
---|---|
<은하해방전선> (0) | 2007.12.01 |
치열하되 아름다운 루시드 폴의 '귀환' (0) | 2007.11.30 |
꼰대와 거장의 차이 -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Magic〉 (0) | 2007.11.29 |
All that jazz movie - 래그타임에서 퓨전재즈까지 (0) | 2007.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