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되 아름다운 루시드 폴의 '귀환'
과학도 조윤석의 <국경의 밤>에는 얼마 전 그가 스위스 화학회에서 최우수 논문상을 받았다는 가십을 가벼이 압도하는 깊이와 서정이 심해의 물처럼 흐른다.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 출처 : <시사 IN> 제 660호 2007년 11월 26일
2006년 9월23일 새벽, 부산 앞바다에서 익사 사고가 일어났다. 고인의 이름은 김정찬. 향년 33세. 강원도에 있는 고등학교 교사였던 그에게는 17년 지기가 있었다. 그 친구는 음악을 했다. 이름은 조윤석. ‘루시드 폴’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사고 후 약 20일이 지나 루시드 폴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노래 가사를 하나 올렸다.
‘노래할게’라는 제목으로 몇 시간 만에 만든 곡이었다. 스위스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과학도이기도 한 조윤석은 유학 생활이 끝나기 전에는 앨범을 낼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런 그에게 다시 노래할 결심을 하게 한 건 친구의 돌연한 죽음이었다. 그는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
“망치로 한 대 맞은 듯이 정신 차리고, 노래 많이 쓰렵니다. (중략) 정찬이가 노래를 하고 싶다면, 내 목으로 같이 노래하고 기타 치고 그러렵니다. 옛날에 고등학교 때 우리가 그랬듯이요.” ‘곡: 윤석+정찬, 사: 윤석’이라는 크레딧이 이 노래에 달렸다. 루시드 폴의 세 번째 앨범 <국경의 밤>은 그렇게 출발했다.
<국경의 밤>이라는 제목은 고국과 외국의 사이, 음악인과 과학자 사이, 언더와 오버 사이에 있는 경계인 같다는 생각에서 지었다고 한다. 루시드 폴의 인생이 늘 국경에 있었다. 부산 출신인 그는 인디 신 초창기 홍대 앞에서 레이니 선, 앤, 피아 등 부산 출신 밴드가 끈끈한 정으로 뭉쳐 활동할 때, 부산 커뮤니티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가 처음 공연을 시작한 곳은 홍대 앞이 아닌 서울대 앞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93년에는 유재하 가요제에서 동상을 받았지만 주류 음악계에 그가 설 곳은 없었다. 심지어 대학가요제에서는 예선 탈락의 고배도 들었다.
루시드 폴의 인생은 늘 국경에 있었다
조윤석의 1998년 데뷔작인 밴드 미선이의 앨범은 주류도 아니고 비주류도 아닌 음악을 담고 있었다. 주류는 아이돌 그룹의 천하였다. 인디에서는 펑크와 하드코어가 대세였다. 델리 스파이스나 언니네 이발관과는 또 다른 미선이의 음악은 모던록에서도 비주류였다. 그러나 그해 음악 잡지 <서브>에서 실시한 독자 투표에서 이 앨범은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불러일으켰다. 그건 그가 서 있던 국경이 단절과 소외가 아닌, 이음과 계승에 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포크의 감성과 진솔한 가사를 미선이가, 조윤석이 드러낸 것이다.
방위산업체에 복무하던 시절 내놓은 루시드 폴의 1집은 그런 감성을 더욱 잘 드러내고 있었다. 시인과 촌장, 박학기, 유재하 등에서 출발해 윤상과 토이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잇는 루시드 폴의 데뷔 앨범은 한국 인디 신이 내놓은 첫 번째 포크 앨범이기도 했다. 2001년 발매된 이 앨범은 미선이 못지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방송 출연 한 번 하지 않았지만, 공연조차 그리 많이 하지 않았지만 입소문을 타고 꾸준히 팔려나갔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루시드 폴은 노래했다. 조용히 감성적 음악을 찾는 이들의 마음에 슬며시 큰 자리를 잡았다. 이듬해에는 영화 <버스 정류장>의 음악을 맡아 그의 이름을 더욱 많은 대중에게 알렸다. 어쩌면 작은 스타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조짐이 충분히 있었다.
루시드 폴의 메시지는 어떤 선동 구호나 도구화된 음악도 전할 수 없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
그러나 조윤석이 전한 다음 뉴스는 새 앨범이 아닌 유학이었다. 소속사로부터 받은 상처가 직접 원인이었다. 새로운 도전이라기보다는 또다른 도피였다. 방구석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던 1975년생 물고기자리의 경계인은 그렇게 스웨덴으로, 스위스로 헤엄쳐 갔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 있는 음악 친구들과 계속 교류했고 유희열이 속해 있는 토이 뮤직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2005년 루시드 폴의 두 번째 앨범 <오, 사랑>을 내놨다. ‘물이 되는 꿈’ ‘들꽃을 보라’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등 여전히 주옥같은 트랙을 담고 있는 앨범이었지만 약간의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평생 사랑을 숨길 것 같았던 그가 사랑을 정면에 내걸었다. 1집에서 빛나던 아마추어리즘은 함춘호, 김광민, 유희열 등이 세션으로 참여하며 고급화됐다. 당시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변했다”라며 지난 시간, 자신이 머물러 있지 않았음을 밝혔지만 변해온 길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 사랑>은 그래서 아쉬웠다.
다분히 개인사에서 출발한, 자칫 먼 훗날 다른 모습으로 만날 뻔했던 <국경의 밤>은 그러나 그 아쉬움을 모두 달래주고도 남는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 찾아온 이 앨범에서 뮤지션과 과학자, 고국과 외국, 언더와 오버의 국경은 무의미하다. 다만 그가 살고 있는 곳, 그가 그리워하는 곳, 그가 바라보는 곳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을 뿐이다.
12월22~25일 공연 위해 귀국할 듯
그는 올해 초, 이 앨범의 레코딩 세션을 하며 연주자들에게 반복을 시키지 않았다. 두세 번 연주하고 느낌이 오면 다소 모자라도 그대로 갔다. 노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과도한 연습으로 순수함이 사라지기 전의 느낌을 담아냈다. 완벽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그래서 더 매력적인 감성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다. 미선이와 <버스 정류장>, 그리고 루시드 폴의 1집과 2집이 모두 느껴지는 루시드 폴, 혹은 조윤석의 현재완료형 음악이 <국경의 밤>을 관통한다. 얼마 전 그가 스위스 화학회에서 최우수 논문상을 받았다는 가십을 가벼이 압도하는 깊이와 서정이 심해의 물처럼 흐른다. 그는 고국의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가족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으며, 치열한 삶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세상을 이야기한다.
미선이의 앨범에서 이미 보수 신문에 대한 짜증을 ‘치질’이라는 곡을 통해 노래했던 그였다. 그의 눈은 더욱 넓어졌다. 사유는 깊어졌다. 루시드 폴은 ‘사람이었네’에서 자본과 세계화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제3세계에 대한 착취를, ‘kid’에서 차별과 폭력을 노래한다. 뜨거운 소재다. 하지만 그는 더없이 담담하다. 격하되 차갑고 치열하되 아름답다. 그래서 그의 메시지는 어떤 선동의 구호나 도구화된 음악도 전할 수 없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카에타노 벨로소, 메르세데스 소사 등 그가 심취했던 제3세계 저항 뮤지션과 마찬가지로. 음악과 메시지가 얼마나 아름답게 만날 수 있는지, 우리는 김민기나 한대수의 옛 음반이 아닌 지금 여기의 음반에서 비로소 알게 된다.
들을 음악이 없다고 그토록 목놓아 외치던 대중이 이런 음악을 외면하면, ‘한국 대중음악의 미래는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국경의 밤>은 발매 닷새가 채 되기도 전에 초판이 모두 팔렸다. 아직 스위스에 있는 루시드 폴은 오는 12월22일부터 25일까지의 공연을 위해 한국에 들어온다. <국경의 밤>을 들으면 혼자서 일기를 쓰고 싶어진다. 공연을 보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질 것이다. 꽁꽁 숨겨뒀던 마음의 이야기를, 루시드 폴이 끄집어낸다.
루시드 폴 새 음반 ‘국경의 밤’
▣ 이재성 기자
▣ 출처 : <인터넷 한겨레> 2007년 11월 29일
|
타이틀곡 ‘사람이었네’는 그의 지식인적 특성을 오롯이 담고 있다. “어느 문닫은 상점/길게 늘어진 카페트/갑자기 내게 말을 거네//난 중동의 소녀/방안에 갇힌 14살/하루 1달라를 버는…” 노래는 페르시아 양탄자와 아프리카산 커피를 생산하는 어린 노동자들의 고단한 현실을 낮게 읊조린다.
무거워보이는 주제를 노랫말로 옮긴 감수성도 좋지만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용기는 더욱 놀랍다. “이란 출신 친구와 함께 양탄자 가게를 지나가고 있었어요. 양탄자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는데, 그걸 만드는 여자 아이들은 하루 1달러밖에 벌지 못한다고 친구가 말하더군요.” 국제전화 선을 타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을 법한, 모범생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위스 유학중인 ‘과학자 가수’
고향 생각·노동자들 현실 노래
다음달 22일부터 귀국 콘서트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나와 스위스 로잔공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의 전공은 재생의학(조직공학)이다. 로잔공대 생명공학연구소의 연구원을 겸하며, 세포나 조직의 재생을 돕는 약품을 개발하고 있다. 교수와 함께 대기업의 연구과제를 수행하며 쓰고 있는 논문이 곧 박사 논문이 된다. 네슬레, 노바티스, 로슈 등 초국적 자본의 본거지에서, “청년이 된 그러나 내겐 소년인”(‘국경의 밤’) 그의 여린 가슴을 치는 것은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이다.
그는 “스위스의 제약회사들이 약을 개발하면 우리나라를 포함한 제3세계 사람들이 헐값에 임상실험에 동원된다”며 “내가 신약을 개발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든다”고 말했다. 내년 여름이면 박사과정이 끝날 듯하지만, 계속 이 길로 가야하는지 회의가 들기도 한다. 향후 진로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쌀쌀한 서양인들 틈에서 사람의 온기가 그리워진 그는 “요란스런 한밤의 불빛은 없지만/어디에서나 보이는 크고 소담스런 사람들”(‘라오스에서 온 편지’)을 그리워하며, “걱정마, 넌 우리보다 더 따뜻하단다/자랑스런 네 검은 피부 가리지마라”며 흑인 소년의 어깨를 주물러준다. “혼자라는 게 때론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고향 생각을 부추기지만, “올해 달력 위 붉은 글씨/추석이 와도 약해지지 않으려”(‘마음은 노을이 되어’) 마음을 다잡는다.
루시드 폴은 최근 ‘과학자 가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동료들과 함께 작성해 그가 발표를 맡은 논문이 스위스 화학회에서 최우수 논문 발표상을 받은 것이다. 낮에는 연구에 매달리고 밤에는 음악을 하는 이중 생활을 용케도 이어가고 있다. “딴 짓을 안 하기 때문”이라며 그는 겸손해 했다.
대학생 때 인디밴드 ‘미선이’를 만들어 활동하느라 학부 성적이 나빴다. “제가 유학 가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걸 대학 동창들이 알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라며 그는 웃었다.
12월 22일부터 25일까지 서울 흑석동 중앙대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3집 발매 기념 콘서트를 연다. 벌써 매진 상태여서, 26일 앵콜 공연을 하기로 했다. 30일에는 그의 고향인 부산 을숙도문화회관에서 공연한다. 루시드 폴은 공연 시작 일주일 전인 15일 귀국한다.
'스크랩 > 문화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하해방전선> (0) | 2007.12.01 |
---|---|
프랭크 시나트라의 〈올 오어 너싱 앳 올〉 (0) | 2007.11.30 |
꼰대와 거장의 차이 -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Magic〉 (0) | 2007.11.29 |
All that jazz movie - 래그타임에서 퓨전재즈까지 (0) | 2007.11.26 |
베니 굿맨 밴드의 〈싱 싱 싱〉- 재즈, 미 주류음악계 화려한 신고식 (0) | 2007.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