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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성과 대중, 갈림길에 서다 - 진중권/천정환 대담

by 내오랜꿈 2007.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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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성과 대중, 갈림길에 서다 

<대학신문> 2007년 11월 04일



진중권 “근대성의 부족”, 천정환 “근대성의 포화”
한국 대중, ‘파시스트적 군중’과 ‘자율주의적 다중’의 양면성 보여 

지식인, 현상의 원인을 끝없이 합리적으로 보여줘야
계몽의 시대는 끝났지만 계몽의 과제는 계속된다



지난해 발생한 일명 ‘황우석 사태’는 한국 문화의 병리적 측면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문화적 ‘거울’이었다.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인 올해 8~9월에는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와 관련된 논쟁이 벌어져 평론가들에 대한 대중의 거센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처럼 외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현상, 대중현상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 현상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최근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두 사람의 문화평론가, 진중권과 천정환이 이 물음에 답하고자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한국의 근대성과 대중, 그리고 지성을 열쇳말 삼아 대담을 진행했다. 지난달 29일 서울대 두레미담에서 열린 대담은 근대성에 대한 이견으로 초반부터 후끈 달아올랐다.

사회 : 원선우 편집장
정리 : 서형준 부편집장
사진 : 서유경 사진부장
속기 : 장서연 수습기자 


▲ 지난 29일(월) 서울대 두레미담에서 진행된 대담장면.


▲ 진중권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좁은 의미의 미학을 넘어
사회학적 존재미학을 탐구 중이다.


▲ 천정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의 근대 문학에 대한 
문화론적 연구가 주된 관심사다.


사회(원선우 편집장): 오늘날의 한국 문화에 대해 논의하려면 한국의 근대성 전반에 대한 평가가 선행돼야 할 것 같다. 

천정환(이하 ‘천’) : 근대를 합리적인 것, 인권과 보편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 더불어 타자에 대한 폭력과 제국주의, 인종주의 등의 이면도 갖고 있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한국의 근대성은 포화 수준이라고 본다. 포화된 근대성의 폐해가 최근에 발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말해 근대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권력이 도를 넘어서 (사람들의) 자치에 대한 생각을 빼앗아 버렸다. 그것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한다. 

진중권(이하 ‘진’): 나는 근대성의 개념을 제국주의로까지 확장하지 않고 철학적 프로젝트로 한정해서 본다. 바로 자율적 인간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서구에서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시민의식의 성숙이 함께 일어났지만 한국은 물적 토대와 상부구조의 발달이 따로 진행됐다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치사회에서 근대성은 4ㆍ19, 5ㆍ18 등을 통해서 차츰 성장해 지금은 상당한 수준에 다다랐지만 더 높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은 민주화 혁명을 이뤄냈지만 아직도 산업화시대의 군사독재의 잔재, 즉 집단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개인이 충분히 자유롭지 못하다. 

미디어의 관점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 근대는 기본적으로 문자문화인데, 한국은 문자문화로의 진입이 비교적 늦었다. 해방 이후에도 문맹률이 90%에 달했지 않나. 또 서구에서는 500여년에 걸쳐 서서히 이뤄진 문화 변화가 한국에서는 50여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뤄졌다. 이 때문에 문자문화가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영상문화 시대에 도달하면서 문자문화가 쇠퇴해 버렸다.

천: 1930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문맹률은 78% 정도였으며, 해방 이후 조사에서는 60% 정도로 변화했다는 점은 먼저 지적하고 싶다. 문자문화 전통이나 서구의 개인주의적 전통이 한국에 결여돼 있었다는 점은 수긍한다. 하지만 이는 근대성의 결여나 결핍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근대성의 이면들, 그늘들 때문이다.  (월드컵 응원에서 보듯) 사회 전체적인 동시성이 무척 높다든지, 계속되는 개발과 중앙집중, 한국적인 가족주의, 민족주의 등 한국사회가 계속 처할 수밖에 없는 질곡들이 근대성의 부정적 측면들을 증폭시키고 있다. 시민사회를 형성시켰던 서구의 근대조차도 사실 내면을 살펴보면 다른 사회나 식민지에 대한 폭력이라든지, 여성이나 노동자 계급에 대한 폭력을 수반하면서 이뤄졌다는 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 

진 : 가장 근대적인 현대 서구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을 가리키면서 그것을 왜 근대성이라고 표현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근대성 자체가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거나 폭력으로 연결된다거나하는 식의 탈근대 담론에 찬성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근대의 탓으로 돌려버리면 안 된다. 칸트나 데카르트, 경험주의 철학에 꼭 제국주의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제나 나치를 보면 자신들은 근대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구술문화와 같은 봉건적인 이데올로기를 이용했다. 야만적인 문화가 근대적인 기술과 결합해서 제국주의가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시대는 잘못이 없다.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천 : 자본주의와 그에 결합하는 국민국가가 문제 아닌가?

진 : 국민국가와 자본주의 자체도 식민주의를 함축할 필요는 없다. 로마는 자본주의 이전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복전쟁, 노예, 속주(屬州)가 있지 않았나. 중국도 마찬가지다. (19~20세기에는) 서구에서 식민주의 경향이 기술과 결합돼 전세계적으로 확대됐다는 차이만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나 야만성의 문제를 근대성의 포화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됐다고 본다. 

▲ 지난 2002년 한ㆍ일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팀을 응원하는 사람들. 한국의 근대성과 대중은 ‘군중’과 ‘다중’의 길 중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사진제공 : 로이터 통신)



사회: 이제 다른 열쇳말인 대중으로 넘어가보자. 근대성의 문제성과 대중은 불가분의 관계인데, 2007년 한국의 대중은 어떤 사람들로 이뤄져 있고, 대중의 속성은 무엇으로 볼 수 있는가? 

진 : 인민ㆍ민중과 다르게 대중은 대중매체와 더불어 등장했다고 본다. 하나의 원본으로 수십만의 복사본을 만들 수 있는 기술, 그리고 그런 복사본을 소비ㆍ향유하는 사람들을 대중으로 정의한다. 한국의 경우 대중이 인터넷과 더불어 부각된 것 같다. 

대중을 흔히 엘리트 그룹과 분리시키는데, 나는 모든 사람이 대중이라고 본다. 나도 특정 부문에서는 전문성을 갖고 있지만, 내 분야를 넘어서면 대중이 된다. 

천 : 그 말에 동의한다. 실제로 대중현상의 ‘외부’는 존재하기 힘들다. 대중현상은 미디어, 국가 ,자본에 의해 사람들이 군집화된 현상, 어느 순간 특정 사건에 쏠리는 현상을 말한다. 이때 대중 안에는 노동자, 여성, 청소년, 많이 배운 사람, 재산이 많은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계급이나 젠더의 차이를 흐린 채 대중이란 말을 사용한다면 이 개념을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진 : 대중은 하나의 본질만을 갖는 집단이 아니다. ‘황우석 사태’ 때나 이번 「디-워」 논쟁에서 볼 수 있듯, 대중은 두 가지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듯하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말한 파시스트적 ‘군중’의 길과 안토니오 네그리가 원하는 자율주의적 ‘다중’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어 ‘황우석 사태’ 때의 브릭(BRIC, 생물학연구정보센터)은 인터넷이 갖고 있는 집단지성의 위력을, 대중의 다중으로서의 가능성을 정확하게 보여줬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항상 소수라는 게 문제다. 다시 말해 다수의 군중화와 소수의 다중화로 대중이 분리되고 있다. 

천 : 대중현상에는 항상 위험성이 내포돼 있다. 한 방향으로 확 쏠리는 현상 속에서 희열을 맛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 배후에서 대중을 이용해 자기 권력이나 자본의 이해를 실현시키려는 사람들 때문에 대중현상에는 폭력성이 늘 잠재돼 있다. 

진 : 미국에서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처럼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행동하지 않았다. 외려 한국인들에게 “너희가 왜 미안해하느냐”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이외에도 독일, 프랑스 같은 나라는 우리 못지않게 발달한 대중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들 나라와 비교해 볼 때 한국사회의 대중현상을 일반적인 대중론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한국적인 습성이다. 

사회: 대중의 위험성과 가능성에 관해서는 두 분이 생각을 함께 하는 것 같다. 그러면 한국 대중의 위험성의 사회문화적 배경은 무엇인가? 

천 : 한국사회에는 개인이 비판적 이성으로서 역할하는 것을 막는 구조가 있다. 민족주의, 가족주의 같은 집단문화가 바로 그런 구조인데, 이것이 한국의 자본주의 전개과정과 만나 악화된 측면이 있다. 대학 입시에서 자녀가 떨어졌는데 (비판적 개인으로 행동해야 할 자녀 대신)  어머니가 학교에 전화해 “우리 딸 왜 떨어졌죠?”라고 말하는 식이다. 두 번째는 민족적 측면으로, 식민지로서의 피해자 경험이 변형ㆍ재생산되는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세 번째는 지정학적 측면으로, 한국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라는 소위 ‘슈퍼파워’에 둘러싸여 있다. 한국은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항상 불안해 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이런 것들이 대중의 위험성을 초래하는 요인들이라고 본다. 

진 : 나는 국가권력이 정치적인 통제를 위해서 물적 토대의 근대화만 허용하고 개인의 자유화는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유화된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묶어 관리하는 것이 편하니까. 이런 습속이 아직도 남아서 진행되고 있다. 

세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단순히 지정학적으로 판단한다면 우리가 벗어날 길은 없다. (강대국인 러시아 옆에 위치하고 있지만 시민적 합리성을 성취한) 핀란드와 같은 해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회: 대중의 위험성에 대한 해법은 무엇인가?


진 : 한국인의 신체 구조를 잘 보는 것이 해법이다. 한국인은 근대적인 군사문화와 전근대적 신화적 의식으로 무장하고 탈근대적인 매체를 이용한다. 그것을 해체시켜야 한다. 이것은 습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싸움이 필요하다. 내가 ‘「디-워」  논쟁에서 대중의 욕을 먹으면서도 끝까지 버텼던 이유는, (집단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디-워」 에 대한 부정적인 평들이 등장하지 않았나. 

천 : 동의한다. 작은 자치들도 중요하다. 현재 한국사회는 대학이든 회사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장소에서 보수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굉장히 큰 문제이기 때문에 (회사와 학교 같은) 작은 단위에서 자치를 만들어내고, 그들과 연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젊은 세대들은 경험이 없어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어떻게 연대해야 할지 모른다. 큰 집단을 이뤄서 싸우는 것이 당장 가능할 것 같지는 않고, 작은 싸움을 계속 벌여나가고, 연대의 가치를 만들어 나가는 방향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회: 그렇다면 대중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진 : 대중들은 뭐가 문제인지에 대한 자기의식이 있어야 한다. 지식인은 “내가 옳다. 내 말 들어라”라는 말 대신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끝없이 합리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우리 신체가 어떻게 구성돼 있으며, 우리는 왜 특정한 행동양식을 보이는 가에 대한 분석들이 대표적인 예다. 이를 통해 대중들이 앞으로 (자신의 신체와 행동양식을)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의식을 심어줘야 한다. 나는 그것을 ‘존재미학적 제시’라고 표현한다. 

지금은 예전처럼 지식인이 존경받는 시대가 아니다. 옛날처럼 지식인이 포괄적이고 넓은 층위에서 지성을 대변해서 말하기보다는, 자기 전공분야에서 대중들에게 자기의식을 매개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천 : 계몽의 시대는 끝났지만 계몽의 과제는 계속되고 있다는 말인 것 같은데, 동의한다. 지식이 널리 개방ㆍ공유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지식의 공유를 막는 힘들이 계속 작용하고 있다. 또한 현재 지식인들이 자기 전공지식 외에는 잘 알지 못하고, 지식을 통합하는 능력도 낮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지식 자체나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존경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진정한 생각들, 진지한 모험들은 존경을 받지 않는가. 진 선생님이 「디-워」 사태에서 다른 한편으로 받았던 많은 격려도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인 지식인상이나, 레닌주의처럼 외부로부터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의식성을 주입하는 것은 불가능해진 것 같다. 하지만 계속적인 생각의 깨우침이나 연대, 자기의식 가지기는 계속 진행돼야 할 것이다. 

진 : 미래의 문맹은 영상을 못 읽는 사람이다. 대중들은 황우석이 제시하는 그림들, 심형래가 제시한 영상들을 다 그냥 믿어버렸다. 그 밑에 어떤 프로그램이 깔려있는지를 보지 못했다. 

이제 세계는 이미지가 구성한다. 이미지는 실사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구체적이다. 반면 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기술은 문자에 기반한다. 복잡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하는 거다. 문자는 점점 더 추상적이 된다. 둘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대중은 이미지만 보고 문자로 된 토대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대중은 이미지를 더 진실한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지식인의 역할이 생긴다. 이미지 아래에 숨어있는 의미, 의도, 프로그램 등을 읽어내 대중에게 알려줘야 한다. 황우석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사실 포토샵으로 거짓 영상을 만들어냈다. 포토샵이라니 얼마나 허탈한가? 브릭이 거짓을 밝혀낸 것이다. 이것이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이다.


사회: 근대성과 관련한 문제를 살펴봤으니, 근대성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

진 : 포스트모더니즘, 더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철학은 무책임하게, 이론적 섬세성 없이 한국에 들어왔다. 우선 그 이론 자체도 문제가 많다. 독일에서는 비판적 이성(Vernunft)과 도구적 이성(Verstand)을 구분한다. 전자는 목적의 설정에 관한 합리성, 후자는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에 관한 합리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사유체계에서는 레종(Raison)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수렴된다.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 프랑스에서는 합리성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나가는 거다. 독일 사람이나 독일에서 공부한 나로서는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 이론은 근대 그 자체, 합리성 그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빠져버렸다. 

말하자면 격이 있어야 파격을 할 것 아닌가? 하지만 한국에서는 격을 세워야 하는 상태에서 한국적 상황과는 다른 상황에서 탄생한 파격을 들여왔다. 이러면 격이 없는 것과 같아져버린다. 전근대와 근대가 혼동돼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대결해야 할 지점이 근대를 넘어선 탈근대적인 가치로 설정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실천적 보수로 변했다. 전근대적인 가족주의를 근대 개인주의 극복에 대한 해결책으로 둔갑시키고, 전근대적인 감성을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난센스가 일어난다. 

천 : 탈근대주의, 탈식민주의는 아시아ㆍ아프리카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시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사이드, 바바, 스피박 같은 사람들이 미국에서 활동은 했지만 그들의 논리는 서구적 중심성을 전복한다는 의의가 있었다. 이는 인정해야 한다.  

진 : 이론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이것이 옳다’는 강한 관념으로 우리와 맞지 않는 이론을 한국에 대입하려 하면 보수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론을 나이브하게 수용한 사람들, 그리고 그 이론을 (불순한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이론의 보수적 수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천 : 한국에서는 박정희식 근대화를 반성하는 탈민족주의, 평화운동론, 생태주의와 같은 흐름들이 탈근대론의 영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탈근대론이 갖고 있는 비판적 핵심들을 식민주의나 폭력적 근대화, 국가 폭력의 문제를 반성하는 힘으로 이해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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