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끔 날선 칼 날 같이 빈틈없는 동작들, 예컨대 북한 소식 어쩌고 하면서 보여주는 북한 군대의 기계 같은 행렬들, 마찬가지로 국군의 날이면 어김없이 9시 뉴스 자료화면으로 뜨던 제식행렬들을 보면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생긴다.
언젠가, EBS의 '세계의 명화' 시간에 본 <지상에서 영원으로>에 나오는 제식훈련 장면을 보면서도 그랬다.
흔히들 말한다. '군대니까', '학교니까'... 등등. '~니까 당연히 그래야한다'는 것은 누가 만들었나?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빈틈없는, 칼 같은 제식 훈련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것을 당연히 그래야 한다, 또는 당연히 그렇겠지 하며 인정해버리는 우리들의 사고의 획일성이랄까, 관습화된 질서에 순응해버리는 그 어떤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오래된 습관, 오래된 관습... 분명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겠지만, 그게 천 년 만 년 끼고 가야 할 올바른 행동 또는 행위의 잣대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끔은 일탈도, 놀고 먹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언젠가 <한겨레 21> 칼럼에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글이 있었다. 버트란트 러셀의 책 제목을 따온 이 글에서는 성실, 근면이라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부동의 가치에 심각한 반기를 들고 있다.
IMF체제를 겪으면서 허구한 날 들어야 했던 소리가 다시 한 번 일어서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아끼고 열심히 일하자는 구호였다. 난 이런 선전성 홍보 문구나 공익광고를 보면, 볼 때마다 입에서 쌍시옷이 튀어 나온다.
국가가 개인들의 가정 경제를 걱정하는 것이라면 분명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잘난' 국가가 언제부터 우리네 가정 경제를 이토록 걱정해주었나, 하는 것부터 불만이지만 불경기라고 무조건 허리띠를 졸라매고 어쩌고 하는 그 단세포적 발상도 마음에 안 든다.
진짜로 우리나라 말아 먹을 일 있나? 소비되지 않는 생산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적어도 내가 아는 경제학은 불경기에 무조건 허리띠를 졸라매고 절약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이 소비해주는 게 소비하지 않는 것보다 국가경제의 활성화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알고 있다.
사실, 우리가 IMF를 맞은 게 성실하지 않아서,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인가? 그렇다면, 주당 35시간 노동-그것도 많다고 30시간으로 줄이자고 하고 있다-에 여름 한 달은 휴가로 보내는 프랑스 같은 나라는 벌써 망하고 없어져야 하지 않나?
오래된 기억 하나
대학 2학년 때인가? 농활을 갔었다. 그때만 해도 농활가면 농민들 의식화 교육시키러 왔니 어쩌니 하며 잘 받아주지도 않았고, 겨우 섭외가 된 마을 청년회의 도움을 얻어 들어가면 이장이나, 심지어 경찰들의 심한 간섭에 시달리곤 했다.
청년회의 도움을 얻어 마을회관이라도 들어가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가지고 간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야영을 할 경우 심각한 문제 하나가 화장실 사용문제였다. 남자들이야 대충 알아서 해결할 경우가 많지만, 여학생들의 경우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봉사활동이라니까 대학생이라는 자부심(?)으로 따라나서선 온갖 불평을 일삼는, 그때 심정으로는 '확 줘 패버리고 싶은' 여학생들이 문제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실 그때(80년대) 농활팀은 대부분 소위 '운동권' 이거나 적어도 그 근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지라 화장하고 귀걸이하고 따라나선 그 '희귀한' 여학생들이 처음부터 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들었던 생각이었으리라.
대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학생들조차도 적당히 해결할 때가 많은데, 그렇지 못할 경우 남의 집 화장실을 얻어쓸 수밖에.
모 여학생이 급한 볼일 때문에 어느 집 화장실을 이용하게 되었다. 불행히도 그 집은 시골집 치고는 드물게도 개량형 화장실을 따로 갖춘 집이었다.
당연히 그 여학생은 문 앞에서 "똑똑" 노크를 했고, 안에서는 "네~" 하는 응답이 나왔다. 순간 그 여학생은 당연하다는 듯이 문을 열어 젖혔다.
그 여학생은 학과 사무실의 조교 밑에 있으면서 잔 심부름을 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교수방이나 다른 과 사무실에 갈 일이 자주 있었기에 노크하는 것과 안에서 네~ 하는 대답에 기계 같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습관이 배어 있었나 보다.
사실, "네~"라는 대답은 이처럼 들어오면 안 된다는 의미로도, 들어와도 좋다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네~"라는 말이 갖는 '긍정'의 이미지만 간직하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습관이란 것. 혹은 좀더 무겁게 말해서 '관습'이란 것, 참 무서운 것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기억 하나
세상이 인터넷 세상이다보니 취미생활 하나를 즐겨도 인터넷 동호회 활동을 해야 할 경우가 많다. 정보의 획득이나 편의성이란 측면에서 혼자 용을 쓰는 것보단 여러 모로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인터넷 동호회란 곳에서도 획일적인 규칙을 남발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몇 달 전인가? 개인적으로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는 어느 동호회로부터 모든 게시판의 글쓰기를 실명제로 전환한다는 메일을 받았다. 기존에 사용하던 대화명을 모두 실명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요즘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게시판 실명제에 관한 논란을 생각해보면 미리 도입한다는 그 탁월한(?) '선견지명'이 새삼 놀랍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미 회원 모두가 실명으로 가입해 있고 온/오프 라인으로 만나 활동하면서 얼굴까지 익히고 있는 마당에 굳이 왜 실명으로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었다. 단지 가입 회원이 늘어나다 보니 이런 저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생기는 경우가 있으니 미연에 방지한다는 차원이라는 것 밖에는...
몇몇 사람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운영진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확고한지라 재고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논리 앞에서는... 그때 들었던 생각. 아, 저것도 무슨 대단한 권력이라고 저 난리를 칠까, 였다. 그러나 그런 웃기지도 않는 권력에서조차 소외된 난 제발로 떠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인터넷 실명제 논란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인터넷 실명제 논란은 찬성하는 쪽에서는 단순히 '익명성의 부작용'이라는 측면만 부각시키고 반대하는 쪽에서는 '정보유출의 위험성'이라는 측면만 지나치게 부각시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는 역으로 실명제를 실시한다고 해서 익명성에 기댄 부작용들이 없어질 수 있느냐는 측면과 실시하지 않는다고 해서 정보유출의 문제가 없느냐는 측면을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단순논리로 설명되어질 문제는 아닐 것이라는 측면에서 더더욱 그렇다.
문제는 어떤 사회문제가 발생한다고 해서 그걸 하나의 제도나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그 단세포적 발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좀 심각하게 말하면 대구 지하철 참사의 원인은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서 일어난 복합적 사건임에도 주유소에서 개인에게 휴대용 용기에 휘발유를 팔 수 있게 한 것 때문이라며 개인에게 휴대용 용기에 담아 파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드는 것과 동일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사회문제도 한 가지 이유로 발생하거나 하나의 정책을 만든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조금 시간이 더 걸릴지라도 스스로 그 문제해결의 치유능력을 키워나가는 방향으로 제반 여건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필요한 게 아닐까? 아주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남을 밟고서라도 무조건 1등을 해야만 하고, 일류 대학을 들어가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우리의 이 '자기만 생각하는' 교육 시스템부터 바꿔나가는 게 진정으로 익명성의 폐해를 막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닐까?
한 칼에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그 획일적, 파시즘적 사고의 위험성에서 제발 좀 자유로와졌으면 한다.
written date:2003/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