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코스모스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등하굣길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 갓길에 누런 먼지를 뒤집어쓴 채 하늘거리던 코스모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가장 원초적인 모습의 코스모스다. 이 기억 속에서 코스모스는 가을에 피는 꽃이라는 어느 정도 화석화된 지식도 포함돼 있다.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가을에 피는 꽃 코스모스. 그런데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핀다. 가을은커녕 봄이 끝나갈 무렵인 5월에 피기도 한다. 처음 여름에 핀 코스모스를 보고서는 내 기억이 잘못된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형성된 기억이라는 게 무슨 정확한 지식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년 전부터 원예작물학 책을 공부하게 되면서 여름에 피는 코스모스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 5월말부터 피기 시작한 코스모스.
원예작물학은 식물이 꽃을 피우는 조건을 구분하면서 단일식물, 장일식물이라는 준거틀을 내세운다. 글자 그대로 하루 중 빛이 지속되는 길이를 기준으로 장일이냐 단일이냐에 따라 개화가 촉진되는 식물을 나누는 것이다. 물론 좀 더 학술적으로 파고 들면 단순히 빛의 길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빛이 없는 밤의 지속시간, 곧 밤의 길이가 임계기(critical period) 이상이냐 이하이냐(전문용어로 '임계일장'이라고 한다)가 더 중요한 조건이다. 이 밤의 지속시간이라는 임계기를 이용해 개화를 촉진할 수도 개화를 억제할 수도 있다. 우리가 겨울에도 깻잎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단일식물인 들깨를 키우면서 일몰후 일정 시간 빛을 비추어 주면 들깨의 개화조건인 단일 '임계일장'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들깨는 꽃을 피우지 않고 영양생장만 지속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년 내내 국화꽃을 볼 수 있는 이유도 이 '임계일장'을 조절하면서 키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예작물학 책에서는 대표적인 단일식물의 예로 코스모스를 들고 있다. 코스모스는 들깨나 국화처럼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서 상업적 목적으로 임계일장을 조절하면서 키우는 식물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다니는 천변이나 길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야생초다. 그렇다면 단일식물인 코스모스가 어떻게 여름에 꽃을 피운다는 말인가? 형형색색의 꽃이 피는 코스모스를 유전자 조작을 통해 노란색 일색으로 꽃을 피우는 코스모스를 만들었다는 건 본 적이 있지만 개화 감응을 조절했다는 뉴스는 아직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유전자 조작 코스모스라면 모르겠지만 아니라면 원예작물학 책을 수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코스모스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너무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이 코스모스가 실제로는 해방 이후에 도입된 신귀화식물로 분류된다는 사실이다. 멕시코가 원산지인 코스모스는 애초에 화훼식물로 도입되었는데 이후 탈출해서 자생종으로 정착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코스모스는 불과 이십여 년 만에 동해안 어느 시골 동네에까지 퍼진 코스모스였다는 말인데 그 짧은 시간에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코스모스(cosmos)는 '카오스(chaos:혼돈)'에 대응되는 말로 '질서정연함', 또는 '장식'을 뜻한다. 흰색, 분홍색, 붉은색, 보라색 등 형형색색의 꽃이 무질서하게 핀 듯 하지만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고 지은 이름인 듯하다. 어쩌면 코스모스 하면 꽃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그런 사람들에게 코스모스는 '우주'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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